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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노루 Sep 20. 2018

미처 ‘말’로 다 끝내지 못한 이야기들...

슈만의 연가곡 <시인의 사랑>과 <여인의 사랑과 생애>

1847년의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슈만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슈만은 슈베르트를 잇는 19세기의 대표적인 독일 예술가곡, '리트'(lied) 작곡가입니다. 그는 1840년, 자신의 대표적인 2개의 연가곡 <시인의 사랑>과 <여인의 사랑과 생애>를 작곡합니다. 1840년은 슈만에게 있어서 아주 특별한 해였습니다. 사랑하는 여인, 클라라와 결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슈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열렬히 “사랑”을 주제로 하는 시에 음악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대표적인 연가곡 <시인의 사랑>과 <여인의 사랑과 생애> 역시, 바로 그러한 작품들입니다.

 

<시인의 사랑>은 총 65개로 이루어져 있는 하이네의 시 <노래의 책>에서 16곡을 발췌하여 엮은 연가곡으로, 사랑의 기쁨(1~6곡)과 실연의 아픔(7~14곡), 그리고 지난 일들의 회상과 정리(15~16곡)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편 <여인의 사랑과 생애>는 샤미소의 동명의 시집에서 8곡을 뽑아 작곡한 것으로, 한 여인의 삶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그려주고 있습니다.


슈만은 슈베르트의 독일 예술가곡의 전통을 이어받아, 피아노 반주가 그저 노래의 ‘반주’ 역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에 보다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만듭니다. 더욱이, 한때 피아니스트가 되려고 했었던 슈만은 ‘피아노 반주’를 보다 더 비중 있게 만듭니다. 특히, 노래를 다 마치고 난 후, 피아노 반주만 홀로 연주되는 후주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슈만의 대표적인 2개의 연가곡 <시인의 사랑>과 <여인의 사랑과 생애>의 마지막 곡 모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시인의 사랑>의 마지막 16번째 곡은 “옛날의 불길한 노래"입니다. 이 노래 속의 시적 화자는 과거 자신을 배신한 연인으로 인한 슬픔과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관(棺) 속에 연인을 향한 자신의 사랑과 고통을 다 집어넣어 바닷속에 묻어 버림으로써, 과거를 '깨끗하게' 정리하고자 합니다. 허나 연인을 향한 사랑과 그리고 연인의 배신으로 인한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시적 화자는 "하이델베르크의 술통보다 더 넓고 큰 관"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이 관을 묻기 위해 아주 힘이 센 12명의 거인과 넓은 바다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시적 화자는 연인을 향한 자신의 커다란 마음을 힘들지만, 단호히 정리하고자 합니다.  


왜 관이 그렇게 크고 무거워야 하는지 아는가? 그 관 속에는 내 사랑과 사랑의 고통이 들어 있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시적 화자는 자신의 마음을 ‘말’처럼, 정말 ‘잘’ 정리하였을까요? ‘사랑’을 정리하는 것은 그리 말처럼 쉬워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정리한다고 쉽게 되는 게 아니니까요. 이는 슈만의 음악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슈만은 마지막 가사를 이전과는 다른 박자와 빠르기로 설정함으로써, 이후 15마디에 달하는 피아노 후주로 자연스럽게 연결시킵니다. 노래 부분이 주로 단조(c# minor)의 영역에서 진행되었다면, 피아노 후주는 장조(D♭ Major)의 영역으로 바뀝니다. 조성이 단조에서 장조로 바뀌었다고 해서, 시적 화자가 마음을 잘 정리하고 평안함을 찾았다고 속단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긴 피아노 후주의 선율이 앞의 12번째 곡 “맑게 갠 여름 아침에"와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모네 <화가의 지베르니 정원(Le jardin de l'artiste à Giverny)>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12곡 “맑게 갠 여름 아침에”는 실연당한 시적 화자가 외로이 정원을 홀로 거닐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곡입니다. 정원의 꽃들은 슬픈 얼굴의 창백한 모습의 시적 화자를 가엽게 여깁니다. 그러고는 옛 연인에게 화내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슈만 역시, 이 곡의 정원의 꽃들과 그 마음이 같았나 봅니다. 12번째 곡을 긴 후주로 선택한 것을 보면 말입니다. 슈만은 연인을 정리하려 애쓰는 시적 화자가 여전히 딱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연인을 깨끗이 정리하겠노라고 단언하지만, 그 사랑을 쉽게 정리하지 못하며 힘들어하는 그 남자가 말입니다.


 슬픈 얼굴의, 창백한 모습의 그대여....


슈만 <시인의 사랑> 중 제 16곡, "옛날의 불길한 노래"
R. Schumann, Dichterliebe, op.48, no.16 "Die alten, boesen Lieder"
https://www.youtube.com/watch?v=f43U4oibePk


슈만 <시인의 사랑> 중, 제12곡 “맑게 갠 여름 아침에”
R. Schumann, Dichterliebe, op.48, no.12, "Am leuchtenden Sommermorgen"
https://www.youtube.com/watch?v=ywQJK5ynSyM




한편, <여인의 사랑과 생애>의 마지막 곡은 “이제 그대는 제게 처음으로 고통을 주시는군요"입니다. 이 곡은 <시인의 사랑>과는 달리, 시적 화자가 여성입니다. 한 여인은 자신이 꿈꿔 온,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남성은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해 오고, 두 사람은 결국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게 됩니다. 이처럼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온 여성은 처음으로 남편에게 ‘배신’을 당하게 됩니다.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형용할 수 없는 슬픔에 잠긴 여성은 한 마디 한 마디 억누르듯 독백으로 노래를 부릅니다. 그리고 이에 맞춰 반주도 화음만을 연주할 뿐입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베일을 쓰고, 잃어버린 행복을 찾겠다”라고 합니다. 이 마지막 가사를 마치고 나면, 21마디에 달하는 피아노의 긴 후주가 뒤따릅니다. <시인의 사랑>과 같이, <여인의 사랑과 생애>의 피아노 후주 역시, 단조(d minor)에서 장조(B♭ Major)로 바뀝니다. 그리고 후주의 선율 역시 이전의 곡인 첫 번째 곡에서 가져왔습니다.


제1곡은 “그이를 만나고 나서"입니다. 시적 화자인 한 여인은 처음으로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대단하던지, ‘노는 것’도 재미없습니다. 슈만은 피아노 후주를 통해, 남편을 잃은 시적 화자가 베일을 쓰고 남편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가슴 떨리는 첫 만남은 아마도 그녀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을 것이니까요. 그리고 이는 어쩌면 1856년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아이들과 홀로 오랫동안 세상에 남겨질 클라라의 미래를 예견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1878년의 클라라 슈만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슈만 <여인의 사랑과 생애> 중, 제8곡 "이제 그대는 제게 처음으로 고통을 주시는군요"
R. Schumann,  Frauenliebe und Leben, op.42, no. 8, "Nun hast du mir den ersten Schmerz getan"
https://www.youtube.com/watch?v=biGG90w3OOE


슈만 <여인의 사랑과 생애> 중, 제1곡 “그이를 만나고 나서"
R. Schumann,  Frauenliebe und Leben, op.42, no. 1, "Seit ich ihn gesehen"
https://www.youtube.com/watch?v=45n1tJ8CiPM




슈만은 시에서 결코 '말'로 다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피아노 반주로, 그러니까 '음악'으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연인을 깨끗하게 정리하려 하지만 여전히 한켠에 남은 그 헛헛한 마음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림으로 슬픔에 빠진 한 여인이 그 사람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슬며시 미소 짓는 모습을 말입니다. 이처럼 '말'로 다 하지 못하는 것들을 표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음악"의 진짜 힘이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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