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살이철학#3
Zero Tolerance’라는 표현은 보통 불의한 상황이나, 비합리적인 처우에 대해서 ‘참을 수 없다’, 혹은 ‘참아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미국에서 주로 인권단체들이나 사회단체들의 캠페인 용어로도 많이 사용되는데, 예를들면 아동학대에 대해서 우리는 참지 않겠다라고 할때, 이 표현을 쓴다. 정의롭지 않은 상황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저항의 의미이다. 하지만, 지난 5월 트럼프 대통령이 발표한 ‘Zero Tolerance Policy’는 이와 정 반대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더이상 미국으로 밀입국하는 자들을 가만히 두고보지 않겠다는 트럼프 정부의 강경정책 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 정책 발표이후 밀입국자들로 발각된 이주민가정 아이들이 강제로 격리되어 미국내 아직 마련되지도 않은 케이지같은 임시보호소로 보내졌다. 부모잃은 서러운 눈물을 흘리는 아이들의 사진들 몇장이 조심스럽게 외부로 알려지면서, 세계의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트럼프 정부는 바로 밀입국 부모자녀 격리정책은 처리했지만, 딱 5일간의 시행으로 2천여명의 미아가 되어버린 아이들의 부모찾기는 나몰라라 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회단체들과 시민들이 함께 힘을모아 부모들을 어떻게든 찾아서 아이들과 연결해주는 활동들을 진행하고 있는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정부는 더 강경하게 ‘Zero Tolerance Policy’를 고수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초대되지 않은 자들에게 환대 따위의 불투명한 제스처가 아닌, 선이 분명한 제스처를 보여주겠다는 혐오의 의미이다.
트럼프 정부가 이주민 아이들을 부모와 강제로 격리시켜 제대로 시설도 갖추지 않은채로 인간다운 대우를 받지 못하게 한 것에 대해서는 비판할 수 있지만, 지금 당장 타인을 환대하는 정책으로 바꾸라는 요구까지는 실현되기 어려울 것 같다. 내 것을 지키기 위한 혐오는 이유가 있어 보이지만, 나와 상관없는 타인을 궂이 환대까지 해야하는 분명한 이유는 없어보이기 때문이다. 이따금씩 교회나 사회단체들을 통해 봉사활동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되면 부담스러운 시선들이 존재한다. 그 중 하나가 프로그램의 대상을 설정하는 부분이다. 각 단체들이 설정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기준이 주로 ‘불쌍한 사람들’이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생존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는 긴급한 상태에 놓인 타인들의 고통을 공감하고자 하는 노력만으로도 혐오는 극복되었다고 볼수도 있다. 하지만 불쌍한 사람들을 통한 나의 선행이 혐오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마주할 때 연민의 감정이 드는 건 나도 불운과 불행에 빠질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한다. 연민과 두려움은 연결된 감정이다. 타인의 고통을 대할 때 내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자기방어를 더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 갈 수도 있고, 혹은 자기를 해체하며 타인의 고통에 기꺼이 참여하는 보편적인 방향으로 나아 갈 수도 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자기방어와 자기 정당화라는 기제로 향하면 ‘가리워진 혐오’로 나아갈 수 있다. 가리워진 혐오라는 건 자선과 시혜같은 일종의 타인의 고통을 이용한 자기정당화 행위이다. 자선과 시혜는 대상에게 최소한의 필요를 제공해줄테니 그것을 통해 서로가 만족하자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필요를 내가 제단하겠다는 위험한 시선이다. 심지어 자선과 시혜의 미덕을 통해 나는 타인의 고통에 참여한 꽤 괜찮은 사람까지 될 수도 있다. “연민은 변하기 쉬운 감정이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런 감정은 곧 시들해지는 법이다, 게다가 뭔가 행동을 하는 것이 꼭 더 나은 것도 아니다.” ‘타인의 고통’의 저자 수전손택은 인간은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있다고 느끼는 한,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해지기 마련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간혹 타인의 고통을 보며 생기는 연민은 혹시나 나도 그처럼 될까봐 하는 두려움때문에 일시적으로 발생할 수 있지만, 연민의 감정은 자기경계 밖으로까지는 못나가고 일시적으로 발생했다 사라진다.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며 약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전제에 대한 두려움은 연민으로 머물지 않고 넘어서서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과 깊이 연결시킨다. 그 연결을 멈추게 두지 않고, 사회적 고통의 메커니즘을 읽어내고 이를 변혁하기 위한 사회적 행동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이 환대가 아닐까 싶다. 그런점에서 환대는 그야말로 헤겔이 말한 종교적인 경지의 자기극복, 자기초월의 과정이 아닐까 싶다. 나와 타인을 소외시키는 연민의 감정 만으로는, 자기중심성은 극복될 수 없으며 자기도 완성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연민의 감정만으로는, 마르크스가 지적한 계급과 갈등의 메커니즘 역시 직시하지 못한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가 단순히 비참한 존재나 동정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위해 저항하고 그 도래할 새 세상의 주인이 되는 혁명적인 존재여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가 계급의식을 깨달아 주체성을 회복하고, 계급없고 차별없는 새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전거를 마련해야 한다고 믿었다. 프롤레타리아의 소외를 지켜보며 한평생을 그들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혁명을 꿈꿨던 마르크스는 연민에 머무르지 않고, 타인의 고통이 발생한 원인을 어떻게든 밝혀내고 제거하기 위해 실천한 혁명가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계급이라는 그의 자본주의 비판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라는 분명한 대상을 설정하고, 도래할 새 세상을 위해 그들이 당연히 계급의식과 주체성을 가져야한다는 건 어쩌면 그가 프롤레타리아가 아니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당사자가 아니면 나서지 말자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마르크스 정도로 타인의 고통을 통해 연민을 넘어서서 환대의 운동으로 나아가려고 애쓴 사람은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누구보다도 헤겔이 말한 종교적인 자기극복(혹은 자기초월)에 가까이가려 노력했던 사람이 마르크스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에게로부터 발견되는 혐오의 시선을 완전히 거두어내려면, 프롤레타리아라는 분명한 대상의 경계선들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 그렇더라도 타인의 고통을 구체적으로 밝혀내기 위한 작업적 토대가 대상설정일 수 있기에, 이것 역시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타인의 고통이 온전히 내고통이 된다는 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 불가능성은 인정하되, 최대한 구체적으로 고통의 메커니즘을 밝혀내고 저항하는 일은 지속되어야하기 때문이다. 풀기 어려운 난제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 타인의 고통에 대한 자기중심적이고 일회적인 연민을 넘어서서 환대의 운동에 동참한다는 것, 그것이 혁명 그 자체가 아닐까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