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항해하는 돌멩이 May 27. 2021

계산적인 공감

하루살이철학#7


대부분의 항공사의 출국 전 비상시 대피에 대한 안내방송은 자기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비상사태 시 제공되는 산소마스크는 자기가 먼저 착용함으로써 스스로에게 충분히 산소를 제공한 다음에 주변의 사람에게 건내라는 안내이다. 자기가 먼저 살아야 남도 살릴 수 있다는 정신이다. 소위 말해서 ‘돌봄 전문가’라고 불리는 그룹에서도, 특히 사람을 대면하는 상담사나 정신과 의사, 혹은 인권 활동가들, 목회자들에게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사항 역시, 지나친 감정이입을 차단함으로써 클라이언트들에게 반응하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전문가의 필수덕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적절한 거리유지를 위한 형식적인 감정이입 기술들이 훈련된다. 아주 단순히 표현하자면, “아 그랬구나!” 라던가, “너가 이렇게 느꼈다는 거구나” 라는 등의 상대방을 적절히 이해하고 있음을 알리는 대화기술이다. 형식적이고 계산적인 감정이입을 통해서 친밀함을 형성하되, 적절한 거리가 지켜지는 것이 전문가의 자질이라는 것이다. 너를 도와는 주겠지만, 나를 너무 침범해서는 안된다는 견고한 방어선이다. 어디 전문가 그룹의 덕목일 뿐이겠는가. 경쟁을 부추기는 시대에서 자기사랑의 우선성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오히려 감정적이며 비합리적인 사람으로 취급되기 일쑤이다. 상업화되어가고 있는 사랑의 문제를 이 지면에서 다 언급하지 못하지만, 시대를 초월해 제대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만큼 어디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 



신학자 아퀴나스에 따르면, 사랑의 운동은 두 방향으로 향한다고 한다. 첫번째 방향은 대상을 향한것 처럼 보이지만 언제나 자기사랑으로 회귀하는 사랑이고, 두번째 방향은 대상자체를 향해 언제나 열려있는 사랑의 방향이다. 자신에게 머무는 사랑은 눈에 보이는 직접적인 결과를 생산해낸다. 나의 실적과 이익에 도움을 주며, 신체적∙시간적 에너지를 세이브해주어 나의 효용을 높여준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자기사랑은 객관적인 지표가 되어간다. 이와 반대로 타자사랑은 눈에 보이지가 않는다. 타자를 알아가는 것도 힘들고, 타자를 위해 무언가를 실천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타자사랑은 가능하지 않은 일처럼 보이고, 추상적이며 주관적인 일이 된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실제적이며 몸적인 것에만 집착하는 자기사랑을 아퀴나스는 욕망의 사랑(amor concupiscentiae)라고 말했고, 대상자체를 향한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선 감정적인 일치를 향하는 자기사랑을 우정의 사랑(amor amicitiae)라고 말했다. 욕망의 사랑은 언제나 스스로를 주인공으로보고  대상을 사물로 보기 때문에 소유하려고 한다. 반대로 우정의 사랑은 대상의 관점에서 사고하고 이해하려고 하기때문에 함부로 대상을 편견에 의해 취급하지 않고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우정의 사랑이 욕망의 사랑보다는 더 진정한 사랑이라고 아퀴나스는 주장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실제적인 자기사랑을 추구하는 욕망은 꼭 나쁜 것일까? 내가 살아야 남도 살릴 수 있다는 타당해보이는 명제에 과연 비판의 여지가 있는 것일까? 

아퀴나스는 이웃을 자기 보다 더 사랑해야 함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몸을 이웃사랑의 비교점으로 둔 것은 보이는 것의 틀을 넘어서보자는 것이다. 이웃사랑을 통해 인간을 구성하는 몸과 영혼을 분리시킬 것이 아니라, 이 둘의 역동적인 과정을 매개해 보자는 것이다. 자기 몸은 직접 자기 영혼과 연결되어 있기에 나의 아픔과 필요에 즉시 응답할 수 있다. 하지만 이웃의 고통은 눈에 보이지가 않는다.  이웃의 몸과 영혼은 나와 직접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궂이 연결되어 있지 않아보이는 이웃의 고통을 내가 나의 몸보다 더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퀴나스는 신학자이기에 신과의 관계를 모든 관계의 지표로 삼았다. 신 역시 인간과 철저히 다른 형태로 존재하지만, 신은 기꺼이 그의 영혼을 통해 인간을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차이를 넘어서서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적 일치(unio secundum affectum)를 몸소 이루셨다는 말이다. 그것도 계산없이. 이처럼 감정적 일치를 추구하는 신의 사랑을 따라서, 인간도 육체적인 집착을 넘어서는 이웃사랑을 향해 감정적 일치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지 말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아퀴나스의 사랑이론은  메타피직스(metaphysics)-즉,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열정이며 고정되지 않고 운동하는 감정상태를 동반한다.그러기위해서는 자기 몸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사랑의 감정적 일치를 발견해내야한다는 해석이다. 사랑은 언제나 공유되는 감정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사랑의 감정을 매개하는 중요한 공유점은 내가 아니라 누군가의 선을 바라는 것이다. 누군가의 선을 원하는 감정적 일치를 통해 사랑하는 자와의 일치를 도모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아퀴나스의 사랑이론에서 흥미로운 점은 대상을 향한 감정을 중요하게 다룬다는 점이다. 단순히 일시적이거나 즉흥적인 감정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을 체험해보고 나를 그 방향으로 돌려 일치해보려는 과정들이 사랑의 감정이라는 것이다. 사랑의 감정은 체험이다. 체험은 몸과 영혼을 매개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사랑의 감정을 체험하기 위한 감정이입은 중요한 과정이다. 감정이입은 나중심의 감정상태를 지연시키고, 대상에 의해 끊임없이 침투되는 열린감정상태이다. 대상의 입장에서서 그 감정을 계산없이 충분히 체험하는 것이 감정이입이다. 그렇다고 자기사랑을 포기하고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를 억압하는 보이는 것의 욕망들을 거두어내고, 누군가의 선을 소원하는 공유된 사랑의 감정에 자기를 열어두는 것이 진정한 자기해방의 길이라는 것이다. 사랑의 감정을 통해 자기를 해방하고 싶다면,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를 가르는 견고한 방어선을 해체할 수밖에 없다. 만약 진정한 주체성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 해체된 방어선을 뚫고 침투하는 사랑의 감정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체험하지 못한 이웃의 고통에 감정이입할 수 있을까? 감정이입은 내기준에 맞춰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고통을 따라서 나를 체험시키는 훈련이다. 그래서 감정이입은 나의 의도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불가능의 상태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누군가의 선을 염원하는 공유된 사랑의 감정 덕분에 우리는 감정이입의 가능성을 얻기도 한다. 보이는 것의 소유에 집착하느라 너와 나의 파괴를 일삼았던 자기사랑이 아닌, 계산할 수 없는 감정이입을 통한 치유적 사랑이 공유되기를 희망해본다.  




이전 03화 낯선 환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