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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래너하다 Jan 07. 2021

하마터면 남(?)의 인생을 살뻔했다

서른 넘어 찾은 나의 일, 지금부터 다시 시작해도 될까요?


퇴사를 했지만 나는 그 사실을 부모님께 알리지 않았다. 사실은 부모님께 비밀로 하기 위해 일부러 신혼집으로 이사를 한 후에야 회사를 나왔다.



여전히 '안정적인' 직장이 최고라고 여기는 부모님에게 이 사실을 말하면 365일 나를 들들 볶아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학원에 가서 정식 교사가 되라고 얘기한다. 아쉬우시겠지만 난 평생 그 말을 따를 생각이 없다.






난 어려서부터 부모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였다. 착해지고 싶었던 건 아닌데 엄격한 부모님 아래에선 순순히 말을 잘 듣는 아이로 자랄 수밖에 없었다. 어떤 문제든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시키는 대로 따라야 했다. 애초에 답은 정해져 있고, 단호박이었던 부모님에게 나의 의견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부모님과는 진심 어린 '대화'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다.



아이들이 방과 후 놀이터에서 놀 때 나는 늘 학원에 있었다. 소질도 없고 재미도 없던 피아노를 6살 때부터 6년이나 배웠다. 중학교는 학군지로 가야 한다면서 집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중학교로 나를 입학시켰다. 덕분에 중1이던 나는 새벽 6시에 일어나 학교를 갔고, 저녁 10시쯤 학원에서 끝나 1시간 거리를 혼자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공부를 죽도록 하기 싫었지만 혼나는 게 무서워서 어쩔 수 없이 열심히 했다. (착한 아이가 분명했다.) 친구의 부모님은 시험에서 70점만 맞아도 잘했다며 맛있는 것을 사준다고 했다. 그런데 난 90점을 맞아가도 왜 10점이나 깎였냐며 혼이 났다.   



덕분에 나는 늘 주눅이 들어있었다. 내 의견을 말하는 것이 두려웠고, 항상 눈치보기 바빴으며,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 받는 소심한 어른으로 성장했다. 가끔 우리 집에 놀러 온 이모가 "조카~ 뭐 갖고 싶은 거 있어?"라고 말하면 난 늘 없다고 대답했다. 어린애가 왜 갖고 싶은 게 없겠어요.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봐"라고 한 적이 없었다. 대신, 공부가 아니면 하지 말라고 했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을 따라 걸스카웃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공부할 시간이 없어서 안 된다고 했다. 그림은 못 그렸지만 옷 디자인 스케치를 즐겨했다. 중학생이 되면서 외모를 꾸미는 데 관심이 커졌지만 대학을 가면 하고 싶은 것을 맘껏 하라며 못하게 했다. 오로지 공부하는 것 말고 나에게 다른 선택권은 없었다.



결국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난 진로를 찾지 못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에게 부럽다며 말했다. "야, 너는 그림 잘 그려서 좋겠다. 그쪽으로 나가면 되니까."



나는 음악도 못 하고 미술도 못 하고, 잘하는 게 하나도 없다고 하니 친구가 대답했다. 

"그럼 너는 체육교사나 해~" 



그나마 남들보다 조금 나아 보이는 게 체육이었다. 특별한 스포츠 중에 잘하는 것은 없었고 달리기가 조금 빨랐고, 체력측정에 나오는 항목들에 점수를 잘 받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체육이 내 관심사는 아니었다.







고등학교는 결국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인문계로 갔다. 그곳엔 나보다 훨씬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억지로 해온 공부였기에 더욱 흥미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영영 공부와 연을 끊어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지만 시험지를 백지로 내고 나오는 상상까지 했다. 그럼 정말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소심한 복수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게 첫 번째 터닝포인트가 찾아왔다. 나를 아무 연고도 없는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버린 것이다. 이번에도 내 의사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그 선택에 반발하지 않은 것은 그곳이 어떻든 강압적인 부모님 밑에서 자라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미국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에 겁도 없이 선택한 것이다. 그때부터 7년이라는 시간을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영어 한 마디도 못 했던 나는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매일 일기를 썼다. 몰래 눈물을 훔치며 일기에 내 심정을 털어놓는 것, 그것이 길고 외롭던 그 시간을 버티게 하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영어를 알아들을 수 없으니 수업 시간엔 늘 멍을 때렸다. 용기를 내어 외국 친구에게 노트를 빌리고, 그 내용을 받아 적어 겨우 겨우 숙제를 해갔다. 매일 백과사전만 한 교과서를 펴고 9pt도 안 될 것 같은 깨알 같은 영어단어들을 영한사전을 두드려가며 해석했다. 고작 몇 페이지의 내용을 해석하는 데 몇 시간이 걸렸다. 그 내용을 다시 이해하고 머릿속에 집어넣으려면 훨씬 더 오랜 시간 의자에 앉아 있어야 했다.



하루에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날들도 많았다.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이때만 해도 해외 선불전화카드로만 통화가 가능했다. 그마저도 내 전화도 아니고 요금이 많이 나올까 봐 편하게 쓰지도 못했다.)



잠이 들 때면 억지로 눌러두었던 외로움이 뼛속까지 사무쳤다. 엄마가 해준 밥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그냥 말이 통하는 사람과 함께 맛있는 한국음식을 먹고 싶었다.



그렇게 1년을 버텼고 학기 도중 한국 고등학교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던 나는 미국 사립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봤다. 직접 가고 싶은 학교를 찾아서 입학원서를 작성했고 교수들의 추천서를 받아 성적표와 함께 제출했다.



몇 주 뒤 미국 호스트 집으로 '합격'이라는 통지서가 날아왔다. 친구의 노트를 열심히 베껴가며 교제를 씹어먹듯 공부했던 것이 효과가 있었나 보다. 다행히 2학기에는 성적이 그런대로 잘 나왔다.



사실 빵점을 맞아도 그만이었다. 영어를 못하는 것도 당연했고 성적은 거짓말로 둘러댈 수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점수를 잘 받고 싶었다. 어쩌면 그것이 나의 위안이 되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뭐든 핑계가 있어야 하니까.






이쯤부터였던 것 같다. 나에게도 고집이라는 게 생긴 게. 

내 인생에 대한 선택은 내가 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생겼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머리가 좀 큰 나는 완전히 바뀌기 시작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모님의 말을 듣지 않기로 했다. 대신 내 내면의 소리를 따르기로 했다.



완전히 새로운 문화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며 그 사회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17살의 나는. 그 속에서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혼자 알아서 해내야만 했던 시간들이 나를 독립적인 인간으로 바뀌게 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19살, 나는  우연히 책을 만났고 글자에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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