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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 Dec 19. 2020

#1 “사랑은 악마이며 불이며 천국이며 지옥이다."  

#1

사랑은 악마이며 불이며 천국이며 지옥이다.
쾌락과 고통, 슬픔과 후회가 거기에 함께 살고 있다.
-리차드 반필드


그를 만나야겠다고 결심하고 실행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강산이 세 번은 바뀌었을 긴 세월 동안 , 나는 한 번도 그를 잊은 적이 없었다.

살갗에 깊숙이 박혀버린 아주 미세한 작은 가시처럼, 보이지 않는 그는 늘 나를 아프게 했다.

살다 보면 마주하는 수많은 우연 중에 단 한번도 그는 들어있지 않았다.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1994년 이후, 나는 그를 본 적이 없다.

몇 년 전 문득 그가 보고 싶었다.

솨아- 유난 스런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소나기가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싱그런 여름 향기를 들여보내던 그 순간,

그가 떠올랐다.

세상이 온통 초록빛으로 물들었던 그해 여름, 그와 함께 우산을 쓰고 걷던 그 여름밤이 생각났다.

장롱 속 꽁꽁 숨겨둔 작은 상자.

그 속에서 그의 편지를 찾아 밤새 읽고 또 읽었다.

그의 다정한 글씨체를 보고 또 보았다. 꾹꾹 눌러 담았던 그리움이 물밀듯이 밀려와 더는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가 미치도록 그리웠다.

노트북을 켜고, 그의 이름과 나이, 출신 학교들을 입력해 본다. 그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다.

마치 내가 찾지 못하게 꽁꽁 숨어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마음이 상해버렸다.

나한테 들키고 싶지 않아 철저하게 숨어버린 사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게 몇 년이 또 흘렀다...



나는 다시 어딘가에 남아있을 그의 흔적을 찾고있다.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내다가도 불쑥 떠오르는 그의 미소가 나를 괴롭힌다.

그가 보고싶다. 그의 다정한 미소가 그립다. 그의 따뜻한 얼굴을 만지고 싶다.

기억을 더듬는다.

대학 때 그와 딱 한번 채팅창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아... 그의 아이디가 뭐였더라?  다급해진 나는 그 오래된 기억 속에서 그의 아이디를 기억해 냈다.

카톡창을 연다. 한자 한자 또박 또박 그의 아이디를 입력한다.

세상에나.... 그가 있다!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던 그가, 지금 내 핸드폰 속에  들어있다.

손가락의 터치 한 번으로 그에게 신호를 보낼 수 있다니!

당장이라도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보고 싶지만 아직은 용기가 없다.

 





눈부시게 반짝이던 열일곱의 봄날, 그를 처음 만났다.

과학 실험반 서클에 가입하기 위해 찾아간 실험실에서 신입생들을 안내해주는 그를 보았다.

친절하고 다정한 말투, 반듯한 이미지의 그에게 난 한눈에 반해버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제법 먼 곳의 고등학교에 배정받아 툴툴대고 있었는데,

이렇게 멋진 사람을 만나게 되다니!

이 학교에 온 게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꼭 이 서클에 들어가고 싶다. 설마 떨어지진 않겠지?


면접을 본 며칠 후, 결과가 발표됐다.

시험이라면 늘 자신 있어, 크게 걱정하지 않았는데,

슬프게도 나는 서클에 뽑히지 못했다.

대신 학교 대표로 과학기술원에서 진행하는 실험반에 참가하게 되었다.

다들 잘됐다며 축하해줬지만, 나는 슬펐다.

내가 하고 싶은 건 서클이었지, 학교 대표가 아니었다. 이제 나는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거다.



3월의 교정

따뜻한 햇살이 운동장을 노랗게 비추는 시간.

목을 잔뜩 빼고 창가에 서서 그를 찾기 시작한다.

다음 수업은 그의 체육 시간이다.

저 멀리 작은 점처럼 자줏빛 체육복을 입은 그의 모습이 보인다.

며칠 만에 처음 보는 그. 아무리 작아도 나는 알아볼 수 있다.

이렇게라도 그를 볼 수 있는 날은 행복하다.

창가 자리의 친구에게 부탁해 자리를 바꿔 수업시간 내내 선생님의 시선을 피해 운동장의 그를 훔쳐보았다.


가끔 운이 좋은 날엔 매점 앞에서 그를 마주치기도 한다.

그에게 수줍게 인사를 하고 교실로 돌아오는 내 발걸음은 구름 위를 동동 떠다니는 것 같다.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아, 누구에게든 친절하게 되는 마법이 걸리는 날이다.


중간고사를 코앞에 둔 어느 날,

누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그가 우리 교실 뒷문 앞에 서있다.

동그래진 눈으로 달려가 보니 그가 시험지를 내민다.

작년에 보았던 중간고사 시험지를 도움될 것 같아 가져왔다며 시험 잘 보라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져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따뜻함과 다정함이 좋다.


그사이 나에겐 남자친구 J가 생겼다.

J는 지난 봄소풍에서 알게 되었다. 우린 함께 게임을 진행하며 파트너가 되었고,

며칠 뒤, 내가 좋다는 그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나는 그의 고백을 받아들였다.



여전히 나는 그의 체육 시간이면 창틀에 매달려 그를 찾아 눈으로 좇는다.

그는 나에게 아이돌 같은 존재다.

그냥 내가 혼자 짝사랑하는 사람.

나에게는 관심 없는 사람.

나와는 이어질 수 없는 사람.

연예인을 좋아하듯 그냥 그렇게 나는 그를 좋아한다.

그의 반듯함이 좋다. 그의 다정함이 좋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친구가 누군가 찾아왔다며 나를 부른다.

뒷문 앞에 또 그가 서있다. 오렌지색 종이로 곱게 싼 두 권의 책을 내밀며 그가 내게 말한다.


"생일 축하해!"


그가 돌아가고, 나는 책을 가슴에 꼭 안은채 교실 안을 방방 뛰어다녔다.

너무 좋아 하늘까지도 뛰어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후 내내 수업시간에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6월의 어느 일요일, 남자친구와 도서관을 가는 중이다.

그렇다. 나에겐 남자친구 J 가 있다.


얼마나 기다렸던 날인가!

간부수련회를 가는 날이다.

나도 그도 선도부다. 그와 함께 가는 간부수련회라니, 마치 단둘이 가는 여행이기라도 한 마냥, 너무 설레어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어젯밤엔 무슨 옷을 챙겨야 하나 패션쇼를 하느라 옷장을 다 뒤집어 놓았다.

그와 같은 조가 되게 해달라고 평소의 열배쯤 간절히 기도하고 잠들었다.


슬프게도 나는 그와 같은 조가 아니다.

언제나 그렇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게 이렇게 쉽게 이뤄질 일은 없다.

그래도 그와 함께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나 신이 난다.

저녁 행사를 마치고 각자 조별로 자유시간을 갖고 있을 때,

그가 갑자기 우리 방으로 놀러 왔다.

오 마이 갓!

나는 너무 좋아 허둥대며 사과를 가져와 깎아 그에게 먹길 권했다.

나는티나는 행동에 주변의 눈총이 느껴진다.

나는 마음이 숨김없이 얼굴에 드러나는 편이다.

아무리 숨기고 싶어도 모두가 알게 되는 그런 사람.



간부수련회가 지나고 며칠 뒤,

친구와 함께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는 길,

정류장에 멈춘 버스에 올라탄 건 다름 아닌 그다!!!

인사를 하고 싶은데, 왜 나를 못 보지?

못 본 척하는 건가?

친구는 얼른 그에게 가 인사를 한다. 난 못 본 척하는 것만 같은 그의 태도에 상처 받아 고개를 숙인 채 우울한 하루를 보냈다.

친구는 내게 선배가 아무래도 너를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다며 야릇한 미소를 보낸다.

정말 그런 걸까...?

내가 좋아하는 걸 알고 부담스러워하는 걸까?



여름방학이 시작됐다.

지난번 버스에 함께 탔던 그 친구는 전해 들은 얘기라며 내가 혼자 그를 좋아하는 게 불쌍하다고 했다는 누군가의 말을 들려줬다.

이제 그만하라는 씁쓸한 조언과 함께...

이런 말을 전하는 친구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은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다시는 이 친구를 보고 싶지 않았다.



개학을 얼마 앞둔 무더운 어느 날,

전화벨이 울렸다.

그였다.

그가 어떻게 우리 집 번호를 알고 있지? 서클 면접때 적었던가?

잘 지냈냐는 안부와 함께 그는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만나자고 했다.

난 그가 전화를 했다는 어마어마한 사실에 놀랄 시간도 없이, 대체 무슨 말일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가 하려는 말이 두려웠다.



웬디스-

그와 내가 처음 만난 곳이다.

세상이 온통 초록빛이던 싱그러운 여름날, 그와 수줍게 처음으로 단둘이 마주 앉았다.

근황을 물으며 어색한 대화를 이어가다, 머뭇대는 그의 모습을 눈치챘다.

나의 예감이 맞는 거 같다. 친구의 말처럼 이제는 그만해야 될 때가 되었나 보다.


"오빠... 내가 오빠를 불편하게 했다면 미안해요... 나는 그냥 오빠가 편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오빠를 좋아하는 게 부담스럽다면....."


"아니, 그게 아니야"


그가 내 말을 황급히 잘랐다.


"나도 첨엔 그랬어. 널 그냥 편한 후배로만 생각하는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야.

아무래도 너보다 내가 널 더 좋아하는 것 같아."


눈앞에 별무리가 반짝인다.

이건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상황이다.

꿈은 아니겠지?

뭐라고 말해야 하지?

어떻게 이런 일이?

지금 나한테 고백한 건가?

아니! 잠깐만.... 그런데, 나에겐 남자친구 J가 있었다.


엉켜버린 실타래를 풀려고 잡아당길수록, 점점 더 꼬여버려 결국은 가위로 잘라야 끝나는 상황.

꼭 풀고 싶지만 방법이 없다.

나는 J 에게 전화를 걸어 사실을 고백했다.

그리고, 이별을 고했다.

나는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그와 서로의 첫사랑이 되었다.

그는 매일 우리 교실을 찾아왔다.

보고 싶어 들렸다며 짧은 쉬는 시간에 인사를 하고 가거나, 책이나 CD 같은 작은 선물을 주고 가기도 했다.

그가 준 Extreme 앨범의 'More than words'를 수없이 반복해 들었다.

내가 그의 체육시간마다 유난을 떨며 창가에 매달려있던걸 아는 우리 반 애들의 눈초리가 곱진 않았다.

유난스레 매일 찾아오는 그를 보며 '또 왔네... 쯧쯧...'

그래도 상관없었다.

나와 그는 충분히 행복했다.


하늘이 뚫어진 듯 소나기가 쏟아지던 어느 날, 그가 우리 집 앞이라며 전화를 걸었다.

서둘러 나가 보니, 그는 우산도 없이 그 비를 쫄딱 맞고 젖어있었다.


"갑자기 비가 오잖아... 우산도 없는데... 그래서 그냥  맞으면서 걸었어. 그런데 이것도 좋은데!"


그가 미소 지었다.

가슴속에 몽글 몽글 솜사탕이 만들어 지는 기분이든다.

나는 그의 이 다정한 미소가 참 좋다.

그가 작은 상자를 건넨다.

그 속엔 반지가 들어있었다.

내 손가락에 꼭 맞는 반지를 어떻게 골랐을까?

반짝거리는 반지를 손에 끼고, 나는 영원히 끼고 있겠다고 그에게 약속했다.


그는 글을 참 잘 썼다.

그가 준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그의 예쁜 글씨를 보고 또 봤다.

늦은 시간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집에 가는 길,

공중전화로 내게 전화를 거는 시간.

나는 미리 전화기를 이불속에 꽁꽁 숨겨두었다 벨이 울리는 찰나에 받는다.

"여보세요."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고, 무얼 했는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긴긴 통화를 했다.

때로는 아무 말도 없이 서로 전화기만 붙들고 동전 떨어지는 소리만 달칵 달칵 들려도,

우린 서로의 숨소리 만으로도 행복했다.



시험이 끝난 주말이면 함께 영화를 보고,

손을 꼭 잡고 시내를 걸었다.

버스 몇 정거장이 되는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살랑이는 초가을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흩날린다. 머리칼을 넘기는 그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참 이쁘다.

그의 다정한 눈동자는 청명한 가을 하늘보다 더 맑게 빛난다.

촉촉히 젖어 반짝이는 거리가 아름다웠다. 함께 어깨를 마주한 이 시간이 너무나 달콤하다.

 나는 다정하고 반듯한 그가 참 좋았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 내 마음에 악마가 찾아왔다.

여전히 그는 더없이 다정하다.

그런데 나는 더 이상 그를 예전처럼 좋아하질 않는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그렇게 오래도록 짝사랑을 했으면서,

이제와 그가 나를 더 좋아하게 되니 나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게 된다.

이렇게 변해가는 내 마음이 나도 편치 않다.

왜 이럴까?

나는 애초에 변덕스럽고 이기적이고 제멋대로다.


중간고사가 끝난 어느 가을 날,

나는 그에게 이별을 고했다.

나는 그에게 악마가 되었고, 지옥을 선물했다.

정확히 무슨 말을 어떻게 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가 무척이나 화를 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변덕스러운 나에게 화를 낼만도 하다.

그렇게 그와 나는 이별했다.


그리고, 나는 J 에게 돌아갔다.

나는 이토록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인 사람이었다.


세월이 흐른다.

그도 나도 대학생이 되고,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30년이 흘렀다.







그의 카톡 아이디를 찾아내고,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려웠다.

그와 헤어지고 3-4년쯤 지났을 무렵, 딱 한번 채팅창에서 마주쳤던적이 있다.

내가 물었다.


"오빠 나에요... 기억나요?"


그가 답했다.


"내가 널 어떻게 잊겠니..."


그 말을 영원히 믿고 싶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믿고싶은 대로 믿는다.


그를 만나야 겠다.

용기를 내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오빠? 저...기억해요?'


'......'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그는 오래도록 답이 없었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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