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취향입니다
파리행이 결정된 건 몇 달 전의 일이었다.
딸의 골프 내셔널 랭킹에 의해 WATC (World Amateur Team Championship) 참가가 결정되었고,
우린 곧 샌디에이고로의 이주를 앞두고 있었다.
20년 가까이 살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사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없는 와중에,
채 적응하기도 전에 파리를 가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이 된 건 사실이었지만,
다시는 오지 않을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새로 전학 온 학교에서 막 학기를 시작하자마자 우린 바로 결석계를 내고 파리로 향했다.
딸과 나의 첫 유럽여행.
유럽을 간다면 파리를 제일가고 싶다고 늘 생각하던 로망의 장소.
출발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비행 24시간을 채 남기지도 않았을 때, 갑작스레 항공편 하나가 취소되었다.
원래 일정은 샌디에이고를 출발해 시카고를 거처 파리로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시카고에서 파리로 들어가는 비행기가 취소되었고, 우린 당장 다른 비행기를 찾아야 했다.
항공사 콜센터에 전화해 한참을 실랑이 한 끝에 급하게 뉴왁 공항을 경유하는 파리행 티켓을 찾았고,
예정되었던 시간보다 훨씬 빨리 급하게 집을 나서게 되었다.
변경된 항공 스케줄 때문에 밤을 꼬박 새우고 출발한 우리는 몹시 피곤했다.
선택의 여지없이 받아들인 스케줄은 끔찍했다.
6시간이 넘는 트랜싯 타임.
라운지에 들어가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술도 마셨지만 아직도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
딸은 일주일간 빠질 학교 걱정에 미리 받은 숙제를 하며 시간을 보냈고,
나는 와인과 칵테일과 맥주를 번갈이 홀짝이며 버티고 있었다.
길고 긴 비행과 트랜싯 끝에 드디어 도착한 파리 드골 공항.
엥?
이게 그 유명한 드골 공항이야?
매우 실망스러웠다.
작고 낡은 공항.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 직원들.
게다가 딸의 골프클럽과 풀카트는 함께 내린 모든 사람들이 다 사라질 때까지 나오질 않았다.
보통 일반 짐이 아닌 부피가 큰 짐들은 따로 나오는데, 우리 짐은 일반 짐에도, 오버사이즈 짐에도 나오질 않았다.
영어를 잘 못 알아듣는 직원을 붙들고 열심히 설명한 끝에 사라진 직원은 우리 짐을 가지고 왔다.
미리 호텔을 통해 예약해 둔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에펠탑이 보이는 좋은 위치에 자리 잡은 작은 부띠끄 호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삼백 불 대의 호텔이 이렇다고?
호텔비 사악한 샌프란시스코에서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우선 좁디좁은 엘리베이터에는 딸과 내가 우리 짐을 다 들고 타는 것 자체가 힘들 정도였다.
4인용 정도 되어 보이는 엘리베이터에 골프채와 카트를 싣고 러기지와 핸드캐리까지....
간신히 우리 몸까지 구겨 넣고 방으로 가보니, 깜깜하기 이를 데 없는 방. 커튼을 걷으면 바로 앞에 다른 사람들이 보이고, 커튼을 치면 암흑인 상황.
너무 깜깜해서 왠지 침대 위에 벌레가 있을 것만 같은 그곳...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감을 안고 우린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근처 담배가게에서 심카드를 사서 끼우고, 같은 팀 일행과 에펠탑에서 만났다.
우리를 위해 입장권을 사놓았다며 시간이 되었으니 빨리 올라가라고 등을 떠밀려 얼떨결에 에펠탑 입장.
' 아... 나는 그냥 밖에서만 보고 싶었다고.... 굳이 에펠탑 안을 들어올 필요가 있는 거야? '
후회해 봤자 소용없었다.
이미 들어온 이상 사람들의 이동에 방해되지 않게 군중의 무리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일방통행으로 올라가야 하는 길. 뒤돌아 내려갈 수 없었다.
절반쯤 올라갔을 때 너무 힘들어 여기 왜 들어오고 싶어 했냐고 딸에게 화도 내고,
헉헉대고 씩씩대며 간신히 정상에 도착 - 그래 봐야 중간지점 -
철창처럼 보이는 바깥 뷰를 한번 보고, 물도 사 마시고, 한숨 돌리고 다시 내려갔다.
그렇게 우린 파리 여행을 시작했다.
툭툭이를 타고 주요 관광지를 돌고, 지나다 맘에 드는 노천카페에서 프렌치프라이를 곁들인 스테이크를 페퍼콘 소스에 찍어 먹고, 바게트를 질릴 때까지 먹었다.
너무 진해 사약이 아닌가 싶은 커피를 마시고, 달아도 너무 단 디저트를 먹었다.
노천카페에서의 식사 때마다 꿀벌이 마치 파리떼처럼 미친 듯이 달려들었고,
늦여름의 이상기온으로 날씨는 푹푹 쪘다.
다음 날, 오르세를 가고 싶었던 우리는 기나긴 줄에 포기하고 루브르로 향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줄지 않는 줄을 보며 같이 간 일행은 암표라도 구해 보겠다고 했으나, 어찌 저지 우리는 생각보다 일찍 들어가게 되었고, 엄청난 인파 속에서 손톱만 한 모나리자를 사이드 앵글로 관람할 수 있었다.
어딜 가나 추울 정도의 냉방이 되는 미국과는 달리 루브르 박물관은 너무나 더웠다.
에어컨 없이 이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 걸까?
워싱턴은 모든 박물관이 무료인데, 그리고 얼마나 시원한데...
그래도 박물관은 매력적인 곳이다.
시간이 흐르는 걸 잡고 싶을 만큼 보고 싶은 게 많았다.
오늘 시합장으로 가야 하는 일정만 아니라면 문을 닫을 때까지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 문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 나쁜 택시기사에게 눈탱이를 맞고 바가지요금을 지불하고,
미리 예약된 벤을 타고 시합장이 있는 베르사유로 출발했다.
우리가 묵을 호텔은 선수들이 묵는 공식 호텔이었는데 충격적 이게도 방에 냉장고가 없었다.
으아-
상상도 못 한 일.
유럽 빼고는 많은 곳을 다녀봤어도 냉장고가 없는 호텔이라니....
40도에 육박하는 폭염인 이 여름에...
게다가 운동을 하려면 찬물이 필수인데 물을 모두 실온에 두고 먹어야 한다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해가 지면 날씨가 쌀쌀해졌고, 그 덕에 견딜 수 있었다.
다음 날, 첫 연습을 위해 시합장으로 향했다.
이동은 주최 측에서 준비한 셔틀버스가 있었는데, 제법 사람이 많이 탄 이 버스 안에 에어컨이 안 들어왔다.
여기저기서 운전기사에게 에어컨을 틀어달라고 요청했으나,
영어를 못 알아듣는 건지, 못 들은 척하는 건지, 심지어 프렌치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불어로 틀어달라고 했음에도 에어컨은 나오지 않았다.
30분이 넘는 길을 한낮의 여름, 폭염이 온 버스를 에어컨 없이 사우나처럼 앉아 이동해야 했다.
아직 연습을 시작도 안 했는데 선수들은 이미 지친 모습으로 버스에서 내렸다.
이 더위를 달래려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필요해!!
클럽 하우스에 가서 아이스커피를 주문했다.
'아이스커피?'
그런 거 없는데?
파리에는 아이스커피가 없.. 있... 다...
그럼 아이스는 있니?
다행히 아이스는 있었고, 에스프레소 한잔을 시키고 아이스컵에 부어 셀프 아이스커피를 만들어 마시며 안도했다.
그리고 그 이후 늘 아이스가 있는지 물은 후에 커피를 따로 시키곤 했다.
호텔 근처에서 식사를 해결해야 했던 우리는 열심히 구글맵을 뒤져 비교적 평이 좋은 곳들을 골라 하나씩 방문했지만, 결과는 모두 실패였다.
제일 맛있었던 곳이 호텔 1층에 있는 도미도 피자의 치킨 윙이었으니 말 다했지...
스테이크를 시키면 육포보다 질기고 냄새나는 고기가 나왔고,
파스타는 퉁퉁 불어 이맛도 저 맛도 아니었다.
일본 식당을 가면 주인이 중국 사람이었고, 미소 습은 생전 처음 맛보는 이상한 맛이었다.
미식가의 나라가 왜 이렇게 나한테 실망을 주는 건데?
결국 그곳에서 일주일간 살인적인 골프 시합 스케줄을 소화하며 맛없는 음식 때문에 거의 먹지 못한 딸은 살이 쏙 빠진 채 돌아왔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마트에서 웬만한 저렴한 와인을 사도 한결같이 맛있었다는 거...
난 음식에 대한 실망을 와인으로 풀며 매일 밤 와인을 한 병씩 밥처럼 마셔댔다.
딸은 그런 나를 보며 건강이 나빠지면 어쩌냐고 걱정을 했고...
그렇게 열흘간의 파리행은 끝이 났다.
무척이나 더웠고, 매일 바게트 외엔 먹을 게 없었던,
택시기사는 불친절했고, 영어로 의사소통이 힘들었던 곳.
하지만 사진 속의 모습은 그림처럼 아름답고, 어디를 찍어도 모두 작품이 되는 곳.
그래도 가장 좋았던 순간은 있다.
해 질 녘 센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맞았던 차갑고도 따사로왔던 바람과 햇살.
9시가 되도록 해가 지지 않는 긴 아름다움을 지닌 곳.
깜깜해진 밤을 반짝이게 해 주던 영롱했던 에펠탑.
조금은 불편했고, 많이 힘들었고, 실망스러웠던 파리
다음엔 좋은 기억을 남겨주길 바라.
언젠가 다시 갈게! 기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