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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마흔 여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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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 Apr 17. 2023

암점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았다

크리스마스이브를 하루 앞둔 평범한 저녁이었다. 그날도 평소와 같이 와인 한 병을 따고 티브이 앞에 앉아 유튜브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남편과 함께 야식을 먹으며 곧 있을 가족여행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좀 피곤해서였을까? 눈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초점이 잘 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번쩍이는 눈부심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뿌옇게 흐릿한 느낌이 있는 것도 같고....

사실 그날은 아이들과 함께 골프를 다녀왔는데, 깜빡하고 선글라스를 놓고 나오는 바람에 하루종일 캘리포니아의 그 강한 햇빛을 고스란히 눈으로 받으며 골프카트를 운전한 날이기도 했다.

그래도 다행히 구름이 살짝 낀 날이어서 선글라스 없이도 버틸만한 날이었고,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평범한 저녁을 보내고 있었다.

와인을 너무 많이 마셨나? 티브이 화면이 조금 더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눈을 비비고, 감았다 떠도 마찬가지...

이상함을 감지하고, 한쪽눈을 감은채 한쪽 눈으로만 보니, 확실히 왼쪽눈이 이상했다.

시야의 정 가운데 검은 원이 생겨 사물을 모두 가리고 있었다. Blind Spot. 암점이었다.

너무 피곤한가? 낮에 햇빛을 너무 많이 봐서 그런가? 놀란 마음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서둘러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나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왼쪽 눈 시야의 중심에 검고 커다란 원이 선명히 남아있었다.

오른쪽 눈은 멀쩡하니 양안으로 볼 땐 살짝 초점이 안 맞는 정도지만 앞을 볼 수는 있었다.

하지만 왼쪽 눈으로만 보면 세상이 암흑이었다. 중심의 검은 원을 제외한 바깥 부분은 예전처럼 보이고 있었지만, 중심이 가려진 채 가장자리만 보이는 상태로는 앞이 보인다고 할 수 없었다.

갑자기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극심한 공포감이 밀려와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예전에 시야에 굴곡이 생긴 적이 있었다.

창틀이 구불구불 휘어져 보이는 증상을 발견하고 안과에 갔었다.

닥터는 간단히 설명하자면 알레르기나 피로등 어떤 이유로 안구에 물집 같은 게 생겨 그곳을 통과하는 부분이 휘어 보이는 거고, 시간이 지나 고인 물이 빠지면 정상적인 시력이 돌아올 거라고 했었고, 정말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나의 시력은 정상으로 돌아왔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보이지만 휘어 보이는 것과, 아예 무엇엔가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75인치 티브이로 넷플릭스가 시작할 때 커다래지는 N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 큰 화면이 모두 암점으로 가려졌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현실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그날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친한 언니네 가족들을 우리 집에 초대한 날이기도 했다.

왜 하필 지금이지?

병원도 모두 닫은 크리스마스 연휴.

어디를 다쳐 피가 철철 흐르거나 정신을 잃어 응급실로 달려가야 하는 상황이 아닌 건 아는데, 그냥 이렇게 있어도 되는 건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일단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리고 파티를 취소했다.

갑자기 보이지 않는 왼쪽눈으로 인해 초점이 맞지 않고 거리감각이 없어 파티 준비를 하긴 힘들었다. 게다가 그런 마음으로는 즐겁게 파티를 즐길 수가 없었다. 거의 반년만에 만나는 언니네와의 약속을 취소하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당장 내일모레면 가족여행도 예약되어 있는데, 그건 갈 수 있을까?

잔뜩 기대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싶진 않은데....

일단 며칠이 남아있으니 기다려 보기로 했다. 제발 기적처럼 눈이 돌아와 즐겁게 여행을 떠날 수 있길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암점이 생긴 후의 일상은 많은 것들이 불편했다.

차라리 오른눈으로만 보는 게 나을까 싶어 거즈로 한눈을 가리고도 생활해 보았지만 불편한 건 여전했다.

요리를 할 땐 칼질을 하다 손을 베일 뻔하고, 계단을 내려갈 때도 거리감이 없어 휘청거렸다.

당연히 평소에 사용하던 렌즈대신 안경으로만 생활했고, 안정을 취하고 푹 쉬면 좋아질까 싶어 최대한 휴식을 취했다.

아니 사실 움직이는 것 자체가 어지러워 거의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전자기기를 멀리하고, 소리로 듣는 것만 하며 시간을 보냈다.

오디오 북을 듣고, 음악을 들었다.

일기를 쓰고 싶을 땐 보이스 레코드로 녹음을 했다.

자외선이 눈을 자극할까 싶어 집안에서도 선글라스를 끼고 생활했고, 잠깐이라도 집밖으로 나갈 땐 선글라스에 모자까지 눌러 써 최대한 빛을 차단했다.

그래도 그땐 당장 내일 아침에라도 자고 일어나면 말짱해지지 않을까 하는 간절한 희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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