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나 할 수 있지만, 백만 가지 방식의 오해가 존재하는 마케터란 누구인
1995년 방송 작가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가 1996년,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마케팅’은 일도 모른 채 음반 직배사에서 마케터 생활을 시작한 후, “저는 브랜드 마케터입니다”라고 자기 소개한 지 어언 25년째.
말콤 글래드웰의 일만 시간의 법칙을 5번 정도 치른 셈이니, 이제는 내 업에 대해서 좀 얘기해도 되지 않을까. 외국계 소비재 회사에서 마케팅 디렉터라는 직함을 달고 7년째 일을 하다 보면 직업에 대해서 강의해 달라는 모교의 연락도, 글을 써 주거나 강의를 해달라는 외부의 요청도 종종 있어 온 탓에, 그리고 수십 년째 “저는 마케터가 되고 싶어요”라고 희망하는 대학생들이 있는 덕에 도대체 마케터란 무엇인가에 대해 오랜 시간 생각을 해왔으니.
마케터만큼 미디어에서 다뤄지는 모습들과 사람들의 인식이 제각각인 직업이 있을까. 가령 의사가 등장하는 드라마라면, 실제와 다르게 연애가 병원 생활의 큰 부분을 차지하거나 당직 후에도 풀메에 세팅된 헤어 정도일 것이다. (슬기로운 의사 생활에서 리얼리티를 살렸다고 하지만, 안경 뒤의 마스카라, 아주 살짝 흐트러진 왁스로 손질한 머리, 여 1남 4의 구도는 리얼리티의 프레임을 쓴 판타지였으니까. 하긴 이건 주제와 상관없는 얘기로군.)
하지만 ‘마케팅팀’에 근무하는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은 어떤가. 미디어의 마케팅 팀에는 왜인지 여자 팀장이 많다.
심지어 90년대 초반이 배경인 영화 삼진 그룹 영어 토익반에서 삼진 그룹 마케팅 팀 팀장도 당시로서는 아주 파격적 인사였을 여자이다. 그리고 마케팅 팀은 항상 모여서 회의를 하고, 여자 팀장은 왜인지 늘 화가 나 있고 성격이 급하고 직원들에게 아이디어를 내놓으라고 강요한다. 그리고 그 요구하는 아이디어란 것이 “다음 달에 나올 신제품의 광고 카피로 뭐가 좋을지” “경쟁사 모델이 잘 나가고 있는데 그 기를 꺾을 우리 제품 모델로는 누가 좋을지” “주부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신제품으로는 뭐가 좋을지”이고 그것도 꼭 회의에서 돌아가면서 말해 보란다.
신입 마케터는 그 회의에서 팀장의 만족을 자아내는 아이디어로 칭찬받고, 선배들의 시기를 산다. 하지만 주인공의 도움으로 본사 직원 (꼭 백인 남자여야 함)이 한국에 와서 불가능한 요구를 (그게 무슨 요구인지는 정확히 나오지 않음) 하는 미팅에서 그간 숨겨왔던 영어 프레젠테이션으로 본사 직원을 설득시키고 위기에 빠진 팀과 회사를 구해 낸다. 그 프레젠테이션이 펼쳐지는 회의실은 흡사 무대와 같아서, 주인공 마케터는 꼭 빔 프로젝트 앞에서 빔이 쏘는 조명을 받아야 하고, 빔 배경에는 내용을 알 수 없는 벤다이어그램과 각종 도표가 영어로 쓰여 있고, 직원들이 도열하고 앉아 노트와 펜을 손에 든 채 주인공의 현란한 프레젠테이션에 감탄한 후 프레젠테이션이 끝나면 기립 박수를 친다. (모든 직장인들을 정형외과로 안내하는 노트북은 어디에?)
이쯤 되면 다들 마케터는 광고 카피를 쓰고, 제품 아이디어를 내고, 모델을 정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니 기발하고 통통 튀고 맹랑하고 창의적이고 발표력도 뛰어난 사람들이 잘할 수 있는 일인가 보다, 하고 생각할 가능성이 크겠지. 에이 설마, 그래도 브랜드 매니저가 되겠다는 사람들은 경영학 전공을 하거나 전공자가 아니라면 마케팅 동아리에라도 가입해서 공모전에도 응모하는데 마케터의 업이 어떤지 모르진 않겠지? 설마가 사람 잡는 경우가 요즘은 있는 것 같다.
경영학을 전공하고, 유명 사립대에서 심지어 시험과 면접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는 마케팅 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여러 마케팅 공모전에서 입사한 이력까지 화려하지만 브랜드 마케팅과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을 혼동하는 신입 지원자들은 부지기수. 우리 팀 브랜드 매니저의 job description 중 첫 번째 항목을 “P&L management”로 써놓았지만, 심지어 경력직에 지원한 사람들도 브랜드 매니저 업무에서의 P&L management라는 것이 무엇인지, 구글링이나 나무 위키로 대략의 뜻은 알아냈지만 실제 업무에서 어떻게 적용하고 매니지 해나가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마케터란, 광고 모델을 정하거나 광고 헤드라인을 뽑는 사람이 아니다. (이 업무가 좋다면 광고 대행사에서 업무 시작하시길 추천드린다.)
마케터란, 브랜드가 위기에 처했을 때 반짝이는 아이디어 하나와 좌중을 휘어잡는 한 번의 프레젠테이션으로 구해 내는 사람이 아니다.
마케터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고 바깥으로 나돌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마케터란, 어떤 제품을 어떤 포지셔닝으로 어떤 가격에 어떤 채널에 어떤 방식으로 판매할 지에 대한 전략을 세우고 실행하는 사람이다.
마케터란, 합법적 절차와 투명한 프로세스로 제품이나 서비스를 최적의 가격에 판매, 최적의 이익을 남긴 후 그 이익을 재투자하고 사회에 환원하는 전략을 세우고 실행하는 사람이다.
마케터란, 제품이나 서비스가 소비자에게 도달하기까지의 value chain을 총괄하고, 각 밸류 체인을 맡은 담당 부서와 담당자들의 협업을 이끌어 내는 전략을 세우고 실행하는 사람이다.
마케터란, 자신이 세운 전략과 실행 방안이 현실화될 수 있도록 끊임없는 내부 설득 프로세스를 거치고, 부서 간, 팀 내, 상부, 외부 파트너사들과의 커뮤니케이션 - 업무 소통 - 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다.
마케터란, 브랜드가 존재하는 이유, 즉 purpose를 규정하고 제품이나 서비스가 그 purpose를 옳은 방법으로 구현하고 실천하도록 전략을 세우고 실행하는 사람이다.
마케터란, 자신이 매니 지하는 브랜드가 궁극적으로 소비자와 이 사회에 이익이 되어야 함을 잊지 않고 매 순간 최선의 아이디에이션과 결정을 만들어 가고 매니지하는 사람이다.
마케터의 근면함이, 마케터의 직업적 소명이, 마케터의 고난과 보람이 덜 오해받길 바라며.
26년 차 마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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