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는 삶을 위한 일 년>-Day 95

오랜만에 만난 친구

by SUN KIM

오랜만에 친구를 보았다. 근 1년 만이다. 친구는 미국에 살기에 일 년 또는 이년에 한 번 꼴로 본다. 아주 오래 된 친구가 그런지 오랜만에 보아도 늘 어제 본 것만 같다. 그녀의 아이들이 무럭무럭 커가는 것 말고는 비슷해 보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그녀가 아닌 내가.


이번에는 내가 에너지가 많이 없는 상태로 만났다. 사실 무기력증과 우울이 회복되지 않은 채로 말이다. 한 마디로 디폴트 default 상태가 이전과는 많이 달랐다. 나는 아이들이 많은 친구를 위해 멀리까지 이동했다. 그것이 나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간을 내는 것도, 이동을 하는 것도 나에겐 오랜만에 느끼는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셋째 아이가 많이 어린 탓에 친구가 빠져나오는데 힘든 시간을 보냈다. 내가 멀리까지 이동한 탓에 무리하게 나온 것 같아 괜히 미안해졌다. 저녁 7시가 되어서야 친구와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9시 반에 다시 돌아갔다.


친구가 미안해했지만, 사실은 내가 더 미안했다. 오히려 친구는 아이와 있는 게 마음이 더 편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멀리서 오는 바람에 이리저리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2시간 반 동안 나누었던 이야기도 아이들 이야기가 80% 정도를 차지했다. 아이들 교육 이야기가 주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다. 교육문제에 관심이 많은 나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다음이 문제였다.


친구를 숙소로 데려다주고선 이젠 내가 잘 곳을 찾아야 했다. 가족여행인 탓에 친구의 부모님도 함께였다. 나를 본 친구의 어머니는 자고 가라며 설득했지만, 친구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불편해할까 봐 그런가 싶었지만, 숙소에 데려다주면서 어디서 자는지 물어보지 않는 친구를 보니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확실치 않은 다음날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친구와 헤어져 잘 곳을 찾으며 생각했다. 내가 또 무리를 했구나. 무리를 해서 만나러 왔구나. 나만 무리가 아니라 그래서 친구도 무리를 시켰구나. 물론 온 가족이 같이 다 있다는 걸 알았다면 가지 않았을 것 같다. 이전 같으면 이 상황이 섭섭하지도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달라진 것이다.


항상 주는 게 익숙한 나였다. 가까운 사람이면 주는 게 당연한 나였다. 그래서 특히 가까운 사람들에겐 뭔가를 요구하거나 주장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게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그들이 나에게 뭔가를 되돌려주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주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을 느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줄 게 없었다. 정서적으로 고갈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일 년에 한 번 보는 친구에게 섭섭하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이 되었다. 나는 잠시 고민을 했다. 다시 친구를 보고 갈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말이다. 일정이 빡빡한 관계로 보고 가는 것이 나에겐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일 년이 지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히려 내가 만나로 가는 것이 친구에게도 다시 부담을 주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결국 나는 만나지 않고 돌아가기로 했다.


나는 한계점에 서있다는 걸 느꼈다. 더 이상은 나를 혹사시키며 배려를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이제는 알겠다. 오히려 그 배려가 부담이 될 수도 있다. 이전에 누군가 나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남 챙기기 전에 자신부터 챙기라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었다. 내가 나보다 남을 챙긴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알겠다. 그게 무슨 말인지.


내가 더 이상 줄 것이 없는 상황에서는 관계가 유지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씁쓸한 느낌이 든다. 어쩌면 이제까지 맺어온 관계의 모습을 다시 봐야 할 때인 것 같다. 상대방이 아니라 내가 어떠한 식으로 관계를 맺어왔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나를 고갈시키는 방식을 이젠 바꿔야 할 때인 것이다.


내가 있어야 상대도 있고 관계도 있는 것이다. 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는 걸 누구보다 나 자신이 알아야 할 때다. 바닥이 없는 구렁텅이로 빠지고 있는 잡아끌어올려야 할 시점인 것이다. 온전히 내가 존재할 수 있어야 할 시점이다. 그리고 이젠 나에게 익숙한 것이, 편안한 것이 모두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겠다. 익숙한 이유가, 편안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그것이 건강한 이유인지를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그렇게 나에게 오랫동안 풀어야 할 숙제를 던져주었다.


2019년 07월 08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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