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데올로기의 억압 속에 잃어버린 진실한 언어를 찾아서
집에 돌아와 대문을 걸어 잠그면 비로소 낮 동안의 소음들이 부유물처럼 가라앉는다. 어둠이 방 안을 채우기 시작할 때, 나는 문득 내 안의 고독이 기이하게 부풀어 있음을 느낀다. 마치 어린 시절 짓궂은 장난으로 항문에 보릿대궁을 꽂아 바람을 불어넣었던 개구리의 배처럼, 나의 내면은 형체 없는 공허로 빵빵하게 차올라 있다. 그 팽팽한 가죽을 쓸어내리며 나는 하수(下手)의 손으로 펜을 든다. 매끄럽게 닦인 세상의 문법이 아니라, 내 안의 비릿한 진실이 비어져 나오기를 기다리며.
돌이켜보면 내가 서 있던 교단은 거대한 언어의 전장이었다. 그곳에서 언어는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누군가를 포섭하거나 배제하기 위한 날 선 무기였다. 특정 이데올로기가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와 다수의 목소리를 장악할 때, 그 거센 물결에 합류하지 못한 이들의 목소리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질식해 갔다. 정의와 가치를 부르짖는 화려한 수사들이 교실 벽을 타고 흐를 때, 그 선명한 색채에 동의하지 못하는 이들은 존재 자체로 죄인이 되었다. 다수의 확신이 견고해질수록 말없는 소수에게 가해지는 침묵의 압박은 더욱 잔인해졌다. 나 역시 그 소란스러운 대열에 서서 때로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때로는 비겁한 동조로 그 억압의 벽돌을 쌓아 올리는 데 일조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진실한 언어를 잃어버린 채 살았는가. 아침에 눈을 떠 잠들 때까지 우리가 나눈 것은 공감이 아니라 정교한 '회전'이었다. 상대의 눈초리를 살피며 내 이익의 좌표를 계산하고, 혹여 내 말이 다수의 흐름에 역행하지는 않을까 검열하며 뱉어낸 말들은 가슴을 통과하지 않은 채 혀끝에서만 굴러다녔다. 가슴속엔 내보이고 싶은 뜨거운 단어들이 가득 차올라 출렁였지만, 정작 입 밖으로 떨어진 것들은 나를 속이고 상대를 기만하는 매끄러운 기호들에 불과했다. 우리는 그 기호들을 부지런히 날라 서로의 사이에 높고 견고한 절벽을 세웠다.
그 담장 위로 우리는 때로 가시 돋친 조롱을 던지고, 때로 이념의 돌멩이를 주고받았다. 상대의 자존심이라는 예민한 바늘 끝을 건드리지 않으려 비겁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나만의 정답을 요새처럼 구축했다. 배려라는 가면을 쓴 그 비겁한 언어 행위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거대한 바위덩어리가 되어 서로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못질을 해댔다. "아무도 믿지 마라"라는 서늘한 절규가 뼈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남의 말을 믿지 못하는 나의 말이 이미 누구에게도 가닿을 수 없는 죽은 언어임을 자인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언어는 하루 종일 편을 가른다. 길고 짧은 것, 크고 작은 것, 예쁜 것과 미운 것. 본래 이들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며,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성립할 수 없는 상대적인 진실의 두 얼굴이다. 그러나 우리의 혀는 이들을 이데올로기의 칼날처럼 갈라놓고 어느 한쪽에 서서 반대편을 난도질하기에 바빴다. 그 이분법적인 난투극 속에서 언어의 본래 빛깔은 퇴색되었고, 우리는 각자의 진영에 갇힌 채 서로를 향해 짖어대는 외로운 짐승이 되었다. 다수의 박수 소리에 묻혀버린 소수자의 신음소리를 외면했던 그 시간들이 이제야 내 안의 무거운 고독이 되어 차오른다.
편 가르기에 지쳐 돌아오는 길, 가로등 불빛 아래 비친 타인의 어깨가 유난히 무거워 보일 때가 있다. 그 무거운 가슴들이 서로를 스치며 건네는 것은 말이 아니라 젖은 연민의 눈초리다. "당신도 나와 같은 벽 앞에 서 있군요. 당신도 그 다수의 횡포 속에서 숨죽이고 있었군요." 그 찰나의 마주침이 백 마디의 화려한 선동보다 더 깊은 울림을 준다.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 나는 비로소 가슴속에 웅크리고 있던 언어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어루만진다. 낮 동안의 거친 광풍에 상처 입고 구석에 박혀 있던 가련한 진심들이다.
나는 이제 그 단어들을 실 삼아 종이 위에 수를 놓는다. 화려한 웅변가나 사상가의 문장이 아니라, 떨리는 손끝으로 제 마음 하나 겨우 옮겨 적는 하수의 자수다. 비록 보릿대궁으로 불어넣은 고독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위태롭지만, 이 서툰 기록만이 내가 잃어버린 '인간의 언어'를 되찾는 유일한 통로임을 안다. 사람들의 가슴은 본래 다 그러한 법이다. 두꺼운 이념의 벽 뒤에 숨어 누군가 먼저 손을 내밀어주길, 이 가짜 언어의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나는 오늘 밤도 그 기다림의 언저리에 앉아, 누군가의 상처 입은 가슴에 가닿을 실 한 오라기를 정성껏 꿰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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