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에 사기꾼이었던 내가, 당신의 개로 태어난 이유

by 선비천사


아스팔트 위로 쏟아지는 오후의 열기는 맵싸한 먼지 냄새를 머금고 있었다. 나는 베란다 타일의 가장 서늘한 구석에 배를 깔고, 유리창에 비친 내 꼴을 응시했다. 황토색 털이 삐죽하게 솟은 주둥이, 눅눅하게 젖은 검은 코, 그리고 의지와 상관없이 실룩거리는 귀. 이것이 내 현생의 전부다.


전생의 나는 혀 하나로 성벽을 쌓고 허물던 자였다. "이 땅은 반드시 오릅니다. 제 이름을 거세요." 그 달콤한 타액 섞인 문장들에 속아 노후 자금을 털어 넣던 노인의 떨리던 손동작이 가끔 꿈속에서 흑백 화면처럼 흐른다. 그때의 나는 타인의 고통을 '정보의 격차'라 부르며 비웃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 노인이 기르던 누렁이보다 못한 처지가 되어, 사료 한 알의 무게에 영혼을 저당 잡힌 채 살아간다.


현관 너머 복도 끝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진동이 발바닥 패드를 타고 올라왔다. 601호 여자의 하이힐 소리도, 603호 아이의 킥보드 구르는 소리도 아니다. 발꿈치에 힘을 주어 끄는 듯한 무겁고 비틀거리는 금속성 마찰음. 김 부장이다.


순간, 내 척추 아래쪽에서 경련이 일었다. 뇌는 "품위를 지켜라, 너는 인간이었다"라고 비명을 지르지만, 꼬리는 이미 벽면을 사정없이 타격하며 북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 비참한 조건반사. 번호키가 눌리는 소리에 맞춰 나는 현관으로 돌진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훅 끼쳐오는 것은 소주 냄새와 찌든 담배 향, 그리고 말라붙은 땀의 산미(酸味)였다.


김 부장은 가방을 던져두고 거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나를 불러 품에 안는 대신, 바닥에 엎드린 내 얼굴 앞으로 자신의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그의 젖은 코끝을 내 검고 축축한 코끝에 가만히 갖다 대었다.


'코와 코가 맞닿는 순간.'


그것은 이 집에서 오직 나와 그만이 공유하는 지독하게 내밀한 의식이다. 그의 모공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단한 숨결이 내 콧구멍 속으로 직격 한다. 인간의 언어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오직 짐승의 감각으로만 수신 가능한 비문(碑文)들이 내 뇌로 쏟아졌다. 사직서를 가슴팍에 품고 상사의 구두 끝을 바라봐야 했던 비굴함, 대출 이자 문자를 지우며 삼켰던 마른침의 맛 같은 것들.


그는 코를 맞댄 채 낮은 신음을 뱉으며 내 뒷다리 사이, 말랑하고 따뜻한 아랫배를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털이 듬성듬성한 그곳은 개의 몸에서 가장 무방비하고 치욕적인 부위다. 전생의 나였다면 누군가에게 내 배를 내보이는니 차라리 혀를 깨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 부장의 투박한 손길이 리듬감을 타고 아랫배를 원형으로 그리자, 내 뒷다리는 나른하게 풀리고 눈꺼풀은 무거워졌다.


그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전생에 내가 탐닉했던 그 어떤 권력의 맛보다 뜨거웠다. 그는 내 배를 만지며 중얼거린다. "복돌아, 너는 참 좋겠다. 걱정 없어서." 나는 속으로 대답한다. '주인님, 사실 나는 당신이 숨기고 싶은 그 모든 냄새를 맡고 있어요. 당신의 절망은 지금 당신의 땀구멍마다 독한 향기처럼 배어 있거든요.' 하지만 내 입에서 나가는 것은 그저 기분 좋은 "끄응" 소리뿐이다.


저녁 산책길, 공원은 온갖 정보의 전시장이다. 김 부장은 스마트폰 속 주식 그래프를 보며 한숨을 내쉬지만, 나는 발밑의 흙이 전하는 서사를 읽는다. 그때였다. 산책로 맞은편에서 익숙한 체취가 폐부를 찔렀다. 비릿한 라벤더 향 뒤에 숨겨진 서늘한 독기. 전생에 내가 기획했던 부동산 사기 사건의 피해자 중 한 명이었던 여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미간에는 여전히 그때의 절망이 깊은 주름으로 박혀 있었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짖으려 했다. "미안합니다, 내가 그때 당신에게 했던 말은 모두 거짓이었습니다!"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내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날카롭고 비명 같은 "깽!" 소리였다. 김 부장이 당황해 목줄을 잡아당겼다. 여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스쳐 지나갔다. 전생의 죄악은 이토록 가깝고, 나의 사죄는 이토록 무력하다. 인간의 언어를 빼앗긴 형벌은 진심을 전하고 싶을 때 짐승의 소리밖에 낼 수 없다는 절망감에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김 부장은 다시 나를 바닥에 뉘었다. 그는 다시 한번 내 코에 자신의 코를 대었다. 아까보다 더 깊고 긴 접촉이었다. 그는 내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는 나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미천하고 정직한 육신에 기대어 자신의 부서진 영혼을 수선하고 있다는 것을.


전생에 나는 수만 마디의 말로 사람들을 현혹했지만, 단 한 명의 배도 따뜻하게 만들어주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털이 숭숭 난 아랫배를 내맡기는 굴욕을 통해, 한 인간이 내일 아침 다시 지옥 같은 세상으로 걸어 나갈 힘을 주고 있다. 이것은 벌인가, 아니면 은총인가.


밤이 깊어 거실 불이 꺼지면, 나는 김 부장의 방문 앞에 바짝 다가가 눕는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그의 체온이 내 젖은 코끝에 닿는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을 향해 혀를 휘두르지 않는다. 대신 웅크린 몸으로 주인의 밤을 지키고, 그의 슬픔이 묻은 손을 핥으며, 내일 아침 그를 깨울 투명한 짖음만을 준비한다.


나는 꼬리를 말아 내 코를 감싸 쥐었다. 꿈속에서 나는 다시 그 산책로의 여자를 만날지도 모른다. 그때는 짖는 대신, 오늘 김 부장이 내게 했던 것처럼 그녀의 발등 위에 조용히 내 젖은 코를 갖다 대리라. 그것이 이 짐승의 몸으로 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자세의, 그러나 가장 진실한 사죄임을 이제는 알기에. 나는 낮은 신음과 함께 깊은 견생(犬生)의 잠 속으로 침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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