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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manf Jan 12. 2022

22. 우리의 언어는 다르다

2022 1 10 내가 오랫동안 팬이었던 UGA National Championship 우승자가 되었다. 기쁨에 들떠 있을 , 임플란트 크라운이 깨져 오후에 $2000 써야 할 뻔했는데, 한국 치과에서 무료로 크라운을 삽입해주겠다는 반가운 문자를 받았다. 나는  흥분했다. 그러는 중에 도착한 메시지는  성경 그룹의 멤버였는데 다른 멤버의 어머님께서 치매와 오랜 투병 끝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주님을 믿기에 기쁨과 흥분으로 가득 찬 상황에서 예수님을 만나 천국에서 뛰어다니고 계실  멤버의 어머님을 확신하며 행복하다고 말했다. 어머님의 소천이 오랜 병으로 힘드셨던  세상에서 자유롭게  것이라 말했다. 덩달아 우리 팀이 41년 만에 우승을 했는데 그때, 제가 기도를 열심히 드렸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응답이라 생각하고 살아 계신 예수님을 경험했기에 어머님께서 지금 편안하게 예수님과 함께 있을 것을 확신한다고 문자를 드렸다. 그리고 승리에 펄쩍 뛰는 사진까지 보내드렸다.

그렇게 잠이 들고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어젯밤 흥분해서 보낸 문자가 생각이  열어서 보니 어쩐지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위로의 말은 어느 정도 괜찮게 봐줄  있었지만 흥분한 사진은 보내지 말았어야 했기에, 얼른 다른 친구에게 보낸다는  실수로   갔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하루 종일 마음이 무거웠다. 뭐지? 뭐가 문제지? 원인은 완전히   없지만 뭔가 계속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공감력이 떨어지나? 이래서 무슨 작가를 한다고? 소설을 쓴다고? 자괴감마저 들었다.

그러던 중, 내게 가장 가슴 아팠던 “죽음”은 무엇이었나?라는 질문을 하며 어머니를 잃어버린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나는 부모님과 사이가 좋지 않아 20년을 보지 못하고 살았고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조부모님이 돌아가신  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렸고 까마득했다. 그러다 문득, 9년 전에 죽은 강아지 ‘시월이가 생각났다.

강아지가 암에 걸려 1년 동안 투병한다고 유학도 못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가 국제 전문가 일도 계속하지 못하고 그만두어야 했으며 매달 병원비도 장난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강아지는 나에게 자식과도 같았기에 감당했다. 사람들과 수의사의 권유에도 계속 안락사를 미루었고 거의 가는 숨만 았을 때야 비로소 아이를 안락사를 시켰다.  안락사를 오랫동안 못 시켜 아이를  아프게   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강아지의 시체를 들고 집에  순간에도 오열을 했고,  애를 잊지 못해 혼자 여행을 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8개월 동안이나   생각만 하면 눈시울을 붉혔었다. 지금까지도   생일에는  애와 나의 시간을 갖기 위해 혼자 어디로 떠나거나 10:10이 되면 매일 1분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랑한다고 되뇐다. 


그것이 내가 경험한 ‘죽음이란 사실을 상기하자 어머님을 잃은 분의 심정에 공감이 갔다. 오랜 투병일지라도, 그분이 힘드셨을지라도 어머님의 빈자리는 얼마나 그녀를 아프게 했을까? 나는 개한테도 8개월이 걸리는 이별의 시간이 있었는데 평생 함께  어머니를 잃은 그분의 마음은 얼마나 상실감이 클까? 지금 얼마나 아프실까? 그때부터 그녀의 마음에 진심으로 공감이 되며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달았다. 나는 돌아가신 어머님만을 생각하느라 남겨진 가족들의 슬픔을 간과한 것이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경험에서 찾아본 후에야 완전히 공감하고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있게 된 것이다.

나는 그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렸고 그분은  기쁨에  사진마저도 모두 위로가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시면서 엄마와 함께  이별의 시간을 준비했음에도 이별은 결코 쉽지 않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그녀의 이해할  있었다. 하지만 분명 개와 어머님의 차이는 클 것이다.


비록 조금 민망했던 사건이었지만 나에게  깨달음을  것은 우리가 함께 같은 단어로 소통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의미라는 것이었다. 비록 우리가 함께 이해하는 개념은 같지만 우리가 쓰는 단어나 언어에는 우리만의 경험이 들어가고  경험은 사람마다 다르다. 이번 ‘죽음’에 관해서도  번의 경험을 해보았고 가슴 아팠던 사람의 언어와 죽음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 이해하는 ‘죽음 의미가 달랐다. 죽음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죽음을 경험한 사람의 마음을 공감하기 힘들다. 그저 대충 짐작을  뿐이다.

우리가 쓰는 말에는 각자의 감정이 담기기에 우리는 어떤 상황과 언어를 주고받을 , 모두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부분이 다르다. 공감할  있는 능력이 다르다. 그러니 남자와 여자의 언어가 다른 것 같고, 성격이 다른 사람들이 쓰는 언어가 다른  같다.  말은 또한 기대하지 않아야 된다는 얘기가 되며, 살면서 하나하나 겪게 되는 고난의 경험은 그가 속하거나 쓰는 말에 더 깊이 있게 담기고 그와 같은 상황의 사람들을   이해하고 마음을 어루만져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같은 단어를 같은 개념으로 쓴다고 생각할 때는 상대를 이해하기 힘들다.  단어에 각자가 가진 다른 경험이 채워져 공감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면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  누구라도 내가 경험한 것을 경험하지 못하면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완전히 공감하는 것은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  사람이  마음을 알지 못할까?  내가 기대한 만큼 해주지 않을까?”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을  있다. 상대방과 나의 경험이 다르기에 나도  상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도 직시할  있다. 그래서 상대가 내게 불만을 가질 때는, 상대는 자신의 경험으로  단어나 상황을 이해하기에 내가 그와 같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내게 강요하는구나 이해할 수도 있다. 그리고 상대가 내게 그것에 관해 비난의 말을 던져도 그의 경험이 담긴 언어와  경험이 다르거나 없을  있기에 상대가 나보다  깊은 아픔과 시련, 고난이 담겨 있구나. 이해해   있다. 그리고 오히려 상대의 아픈 마음을 들여다 보고 위로해줄  있는 계기가 되며 긍휼을 느낄  있다.


이렇게 말에는 통용되는 개념은 있지만 각자 다른 경험이 담기는 것을 이해했다면  가지 결과를 낳을 있다.

첫번째, 내가 말을 건넬 때, 상대가 공감할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있다.

두번째는 누군가 내게  사람의 마음을 몰라준다고 비난할 ,  사람에게 담긴 단어가 내가 경험한 것보다  많이 아픈 경험이 담겨져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긍휼하게 여길  있다.   단어에 담겨진  사람의 경험을 내게 이야기   있도록  상대를  이해하고 공감할  있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상대를 통해 간접 경험이 쌓이게 된다.

이런점에 미루어 생각해보면 인생에서 나이가 들수록 고난을 겪고 고난의 경험이 풍부해지면 그와 같은 상황을 겪는 사람들을  많이 이해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때의 말은 상대에게 공감을 주는 위로의  말이 된다. 고난의 경험을 통해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 희노애락!  모든 것을 다양하게 경험해 담겨진 단어로 이야기 하는 사람은 분명히  확장된 공감력으로  많은 이웃과 소통할  다. 그래서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끼리 마음이  통한다. 예를 들어, 내가 강아지를 잃어본 경험을 했기에 반려견 죽음 , 우울증 겪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진심어린 위로를 건넬  있다. 그리고  말은 그에게 에너지가 되어 살아갈  있게 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떤 고난이 닥쳤을 , 나는  고난을 경험함으로써 같은 고난을 겪는 사람들의 처지를 알고 위로   있겠구나. 그것이 진정 주님이 고난을 통해 같은 처지의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의 사역은 내가 겪은 고난으로  말에  경험이 담기면 나와 같은 고난을 겪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복음의 말을 전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크고 작은 고난을 주시며 죽을 때까지 겪어야 하는 이유를 이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같다. 같은 처지의 사람을 확장해 동지애를 갖고 함께 살아가복음을 전하라는 , 그것이 내가 세상에  이유인 것이다.

앞으로 고난이 내게 주는 유익은 더 많은 경험이 담긴 말로 같은 처지의 사람을 이해하고 이해받으며 함께 살아가라는 것으로 여기겠다. 그리고 고난에서 발견된 주님의 진리를 복음으로 전하는 일이 내 사명이기에 고난도 감사하며 받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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