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경은 실패한 기분으로 하루를, 6개월을, 남은 날들을 보낼 수는 없었다. 그동안 생활비에서 조금씩 모아 두었던 현금 120만 원이 떠올랐다.
평소에 수경이 좋아하던 명품 백 360만 원이라는 숫자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수경은 그 가방을 가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았다. 갖지 못한 불만 때문에 Ryan을 미워했고 그 스트레스로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기도 했기에 그 가방이 있어야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았다.
‘나도 죽기 전에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명품 가방 하나쯤 가져보자. 내가 죽고 나면 우리 보리가 아가씨 되었을 때, 들고 다니면 되지. 말 그대로 명품이니 시간이 지나도 괜찮을 거야.’
남편을 기다리는 대신 직접 명품 가방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으니 부담되던 높은 금액도 딸에게 물려주면 된다는 생각에 합당하게 여겨졌다. 사겠다고 마음먹으니 마음속에 폭풍처럼 아우성치던 갈등이 잠잠해지기 시작했고 오히려 에너지가 샘솟는 것 같았다.
수경은 시계를 확인했다. 시곗바늘은 11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수경에게는 4시까지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수경은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다른 여자들처럼 힘들게 낳은 쌍둥이 아이들에 대한 보상을 꼭 받고 말 거야. 내 인생에서 가장 위대하고 장한 일을 했다고 남들처럼 내게 상 줄 거야. 내 인생은 절대로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그 가방을 들고 다녀야지. 우리 보리에게도 엄마가 값진 무엇인가를 남겨 줄 수 있어.’
‘그 가방은....
내가 부모 없이 자라서 외로워 보이지 않게,
내가 남편과 언어와 문화 차이로 갈등하며 이제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추어 주고,
육아에 쉽게 지치고 미성숙하고 나쁜 엄마로 보이지 않게,
살이 쪄서 후줄근한 옷만 입고 살아가지만 초라해 보이지 않게,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는 지저분한 집에서 사는 사람 같지 않게,
무엇보다 곧 죽을 여자 같아 보이지 않게 만들어 줄 거야.
나를 부잣집 딸처럼,
돈 많이 벌고 자상한 남편에게 사랑을 많이 받고 사는 여자처럼,
여유 있고 삶이 평탄해 보이는 여자로 만들어 줄 거야.’
수경은 결혼식이나 행사가 있을 때, 가끔 입던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평소에 들어가 볼 자신이 없어 쇼윈도 앞에서 안을 들여다보던 매장 안을, 오늘은 한도가 충분한지 확인한 신용카드를 들고 당당히 들어섰다.
“찾는 게 있으세요? 도와드릴게요.”
매장에 들어서는 수경을 향해 직원이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며 다가왔다.
“아. 네. 저 몽테뉴 St. 5라는 모델을 찾고 있는데 이 매장에 있나요?”
입속에서 세련되게 미끄러져 흘러내린 그 이름이 좋았다.
“아. 네 손님. 제가 한 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직원은 캐비닛을 열어 수경의 눈앞에 검정과 레드 두 개의 가방을 놓았다. 사진으로만 보던 연예인을 눈앞에서 만난 것처럼 수경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두근 거림과 동시에 360이라는 숫자가 떠올랐다. ‘이 작은 가방에 매겨진 숫자가 과연 어떤 기준으로 정해진 걸까?’라는 의문이 스쳤지만 일부러 외면하며 그 가방을 어깨에 메고 친구들 앞에 서있는 장면을 생각했다. 하지만 360이라는 숫자와 Ryan의 월급통장이 다시 떠오르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처음 매장으로 들어설 때의 가슴 두근거림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그때, 직원이 환하게 웃으며 수경에게 가방 구석구석을 보여주었다.
“한번 어깨에 메어 보세요.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직원은 마침 수경이 갖고 싶어 하던 검은색을 내밀었다.
수경은 잠깐의 망설임이 있었지만 당당히 어깨에 걸어 보았다. 매장에 있는 거울 앞에 서 그동안 상상으로만 맸던 그 가방을 손으로 만져보니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물건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상반된 감정을 일으켰는데 그토록 갖고 싶던 가방을 직접 눈으로 보고 만지자 더 이상 그녀를 설레게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방을 멘 거울 속 자신이 부잣집 딸, 부자 남편에게 사랑을 듬뿍 받는 여자, 명품백을 살 만큼의 삶에 여유가 있는 여자, 무엇보다 명품처럼 평생을 살 여자 같아 보였기에 그 가방을 매장에 남겨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얼마죠?”
“네 360만 원입니다.”
직원은 가방 안쪽에 있던 가격표를 꺼내 보이며 수경에게 친절히 대답했다. 수경은 태연하게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직원에게 내밀며 이미 금액을 알고 있던 자신의 질문이 가증스럽다고 생각했다.
“결제해주세요.”
“네 손님. 마침 백화점 행사로 3개월 무이자로 구매하실 수 있으신데 3개월 할부로 할까요?”
360에서 120으로 떨어지는 숫자는 확실히 수경의 부담감을 덜어 주었고, 그녀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교환 및 환불은 1주일 안에 오셔야 합니다.”
수경은 고개를 끄덕였고, 직원은 조심스럽게 가방을 다루며 포장을 하기 시작했다. 직원의 손길에 소중히 다뤄지며 포장되고 있는 가방이 자신에게 넘어오기 위한 과정이라는 점과 번쩍 거리는 고가 명품백이 전시된 계산대 앞에 서있다는 사실이 수경은 만족스러웠다. 웅장한 파티에 누더기 옷을 벗고 화려하고 눈부신 드레스를 갈아입은 신데렐라가 된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왕자님이 신겨주는 유리구두를 신고 그의 손을 잡고 왕궁으로 들어가 평생 이렇게 편안하고 우아하게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수경은 직원이 정성스럽게 포장해 준 가방을 들고, 그녀에게 90도 인사로 배웅받고 매장을 나섰다. 시계를 확인하니 아이들을 데리러 가기까지 3시간이 있었다. 마법이 풀려 현실과 마주해야 하기까지 3시간이 남은 셈이고 미리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리석었다.
수경은 백화점에 있는 조명을 받은 하얀 대리석 위에 어울리지 않는 자신의 구두가 어쩐지 못마땅했다. 유리구두의 이미지에는 너무 많이 모자란 자신의 구두가 ‘너는 그저 마법으로 몇 시간 신데렐라 놀이를 할 뿐’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쇼윈도에 진열된 대리석 바닥과 어울릴 법한 구두에 시선이 끌렸고 매장으로 들어가 가격을 확인했다. 가격표는 현실과 마법의 세계의 경계를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수경은 잘 차려입고 왕궁 파티를 제 집 드나들 듯 즐기는 공주들이 아니었다. 수경은 씁쓸한 마음을 신발보다 저렴한 커피로 달래려고 커피 매장으로 들어갔다. 늘 마시던 아메리카노가 아닌 예쁜 잔에 달콤한 모카커피를 주문하고 오늘은 휘핑까지 얹어 달라고 말했다.
수경은 종이 백을 의자 위에 올려놓고 그 맞은편에 앉았다. 브랜드의 심벌을 보고 있자니 한 친구가 떠올랐다. 이 가방을 몇 년 전에 구입했던 수경의 친구는 집안이 유복했다. 수경이 편입한 대학에서 만난 그녀는 수경보다 나이가 한참 어렸지만 유학을 다녀와 영어도 잘했고 외제차가 귀한 때에 폭스바겐 비틀을 타고 학교를 다녔다. 수경과 수업에서 만나 같은 조가 되어 프로젝트를 맡아 인연이 된 그녀는 지금까지 SNS로 근황을 확인하며 가끔 안부인사를 하고 지냈다. 수경은 그녀가 이 가방을 메고 부모님 사이에서 웃는 사진과 함께 그녀의 아버지 미술 전시회를 축하한다는 글이 떠올랐다. 수경은 이제 그녀가 맸던 그 가방을 자신이 직접 들고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니 사진 속에 웃고 있던 친구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으로 오버랩되는 상상을 했다.
이번에는 조리원 친구들이 떠올랐다. 조리원 여자들의 명품 자랑은 남편 자랑이었다. 하지만 이제 수경에게도 명품 가방이 생겼다. 더 이상 그녀들 앞에서 초라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고 더 이상 가치관이 다르다는 식의 거짓말로 질투를 숨기는 일 따위 하지 않아도 됐다.
그리고 이 가방은 소중한 딸 보리에게 엄마가 물질로 물려주는 유산이 되었다. 보리는 자신처럼 엄마가 없다는 이유로 콤플렉스를 갖지 않길 바랬다. 어엿한 숙녀가 되어 이 가방을 들고 기죽지 말고 당당히 친구들을 만나고 직장 생활을 잘하길 바랬다.
수경은 달콤한 모카커피 한잔을 마셨다. 달콤한 풍미를 음미하며 고급스러운 매장의 인테리어를 눈으로 훑어보았다. 아침에 집에서 느꼈던 어수선한 마음이 아니었다. 질투로 힘들어하고 자존감이 낮았던 자신의 인생을 실패로 여기던 그 여자는 더 이상 없었다. 대신 고급스러운 카페에서 모카커피를 음미하는 아름다운 명품 백을 소유한 여자가 있었다. 커피 한 모금의 기쁨에 떠오르는 아이들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최선을 다해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Ryan에게 고마운 마음이 동했다. 그동안 서로에게 준 상처를 위로하고 처음 사랑을 시작했던 그때로 관계를 회복해야겠다는 용기가 생겨났다.
‘Ryan이 이 가방이 내게 주는 의미와 행복감을 안다면 분명히 나를 이해할 거야.’
수경은 그렇게 확신하며 가방을 들고 커피숍을 나섰다. 척추뼈를 곧게 세우고 가슴을 내밀어 당당한 자세로 종이백을 매고 걷는 자신의 걸음걸이가 마음에 들었다.
수경은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대신 택시들이 줄지어진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