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부부. 서로에게서 서로의 부모를 대면하다

by Momanf

벌써 몇 시간 째 수경은 뒤척거리고 있다. 남편과 어디서 어떻게 문제를 풀어야 할까? 왜 이렇게 소통이 안되는가? 왜 내 본심이 전달되지 않고 늘 다투게 되는 것일까? 왜 이렇게 우리는 다른가? 수많은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두 사람의 다른 모습만 떠올랐다.

예를 들어, 식습관부터 다르다. 수경은 시간에 쫓기 듯 빠르게 식사를 하는 습관이 있어 말없이 식사만 한다. 반면에 Ryan은 음식을 천천히 즐기면서 이야기하며 먹는 것을 좋아한다. 돈에 대한 기준도 다르다. 수경은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즐겼다. 청구되는 카드 빚이 많으면 그 달 소비를 줄이는 식으로 생활했다. 하지만 Ryan은 돈에 관해서 계획이 있고 금전 관리가 철저하고 물건을 사는 일에는 검소하다. Ryan에게 중요한 소비는 주거지, 교육, 여행이었다. Ryan의 그런 습관 속에는 부모로부터 받은 교육이 있었다고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지금껏 의식하지 못했지만 Ryan과 수경 자신의 모습은 고스란히 그들 부모들의 가치였고 생활방식, 삶을 대하는 자세였다.

수경은 누웠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과거의 몇 차례 큰 싸움이 떠올랐고 이성을 잃고 악에 받쳐 소리를 질러대던 야수 같은 자신은 술 마시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던 그녀의 아버지 모습으로 오버랩되었다.

자신이 이성을 잃고 화내는 모습은 영락없이 자신의 아버지였다. 수경은 충격을 받은 얼굴로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토록 부모를 미워하며 절대로 똑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고, 나는 부모보다 몇 배는 더 나은 사람이라 자부하며 아버지를 경멸해 왔었다. 그런데 그 아버지 모습으로 Ryan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아버지는 늘 자기가 옳다고 믿어 상대의 다른 의견에 꼬투리를 잡고 폭력적으로 화를 냈다. 반면 Ryan은 차분한 목소리로 수경의 화를 달래고 먼저 사과하고 한결같이 사랑한다고 말하며 그녀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Ryan을 통해 만난 돌아가신 시부모는 수경에게 언제나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쓰는 분들이었다.

딸인 수경 조차도 끔찍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남편에게 화를 내왔다고 생각하니 죄책감과 자괴감이 밀려왔다. 대화를 시작하는 일조차 두려워하는 Ryan, 그래서 자신을 방어하려는 그의 태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남편은 비정상적인 내 아버지 같은 사람을 만날 필요도 없었는데.... 작은 일에도 늘 화만 냈던 아빠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눈치 살피던 나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어.’

수경은 고통받던 부모로부터 독립해 일찍이 자신의 삶을 재편성하며 살았고 아이들에게 책임감을 갖고 사랑을 표현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받은 DNA나 성장과정에서 배운 부모의 가치관, 생활 방식과 습관들이 고스란히 자신의 모습을 형성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수경은 잠들어 있는 두 아이를 돌아보며 어둠 속에서 아이들을 쓰다듬었다.

‘이 아이들에게도 Ryan과 나의 DNA가 고스란히 전해지고 우리의 가치관, 태도, 생활방식과 우리의 작고 큰 습관들이 모두 전해지겠지. 아이들에게 물려줄 모습이 화나면 이성을 잃고 소리 지르는 것이라니.’

보리와 준이 화를 낼 때, 자신의 모습으로, 수경의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표현한다고 생각하니 겁이 났다. 수경은 어둠 속에서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부모가 한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중요한지, 얼마나 거대한 존재인지를 절감했다. 한 인간에게 부모는 인격을 형성하는 매체가 되고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된다. 부모의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방식은 한 사람의 자존감을 형성하고 사회 속에서 인간관계의 길잡이가 된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사랑은 험한 세상에서 살아갈 회복 탄력성을 갖게 하며 세상을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한다. 부모의 생활방식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상식과 능력이 된다. 한 인간이 맺는 모든 관계 속에는 서로의 부모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수경 자신과 Ryan의 등 뒤에 서 있는 부모들의 모습이 보였다. 동시에 자신과 Ryan 앞에 나란히 서있는 보리와 준이의 모습도 보였다.

수경은 잠든 아이들을 쓰다듬고 입을 맞추었다.

문제의 원인은 모두 자신 속에 있었다는 깨달음은 부부 문제를 해결하는 시작점이 되어 수경에게 작은 성취감을 주었다. 하지만 잊고 지냈던 부모가 기억 속에 떠오르자 수경은 화가 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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