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죽었다고 생각한 고목나무

by Momanf

수경이 Ryan을 처음 만났던 9년 전, 그녀는 영어를 전혀 할 수 없었다. 수경은 영어 학원에서 데스크 선생님이라고 불리었는데 그 일은 아침에 영어학원 문을 열고 청소하고 학원 도서를 주문하고 관리하며 선생님들과 학생들을 보조하고 학부모 상담을 하는 것이었다. 대부분 원장이 지시하는 학원 전반에 관한 관리 및 업무처리를 했다. 수경이 그곳에서 약 2년 정도 근무한 때에 Ryan이 1년 계약으로 학원에 취업했다. Ryan은 미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그만두고 모험 삼아 한국으로 왔다고 했다. 어느 날 저녁, 원장은 회식을 제의했고 네 명의 직원은 그날 식사를 하고 약간의 술을 마셨다. 술기운이 수경의 마음을 조금 편안하게 만들어서였는지 처음으로 Ryan과 대화를 할 수 있었다. Ryan은 학원에서는 늘 인사만 하던 수경이 처음으로 자신에게 이것저것 질문하며 웃는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분위기가 한참 무르익을 때, 원장은 피곤하다며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고 다른 강사들도 하나둘씩 자리를 떠났다. 자연스레 수경과 Ryan 둘만 남게 되었고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대화가 잘 통했다. 술에 취한 수경은 어설픈 영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녀가 부모와 사이가 안 좋아 스무 살에 집에서 나온 이야기, 그래서 자신은 열심히 살아야만 한다는 이야기. 하지만 가끔 외롭고 힘들며 부모가 원망스럽다는 이야기까지. 수경의 솔직한 고백과 당찬 계획들을 들으며 Ryan은 수경에게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Ryan은 수경과 가까워지고 싶어 한국어 책을 사서 수경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Ryan은 더듬거리는 한국말로 “저녁에 뭐해요? 같이 밥 먹어요!”라고 수경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고 수경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것이 두 사람의 첫 데이트가 되었고 수경은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며 두 사람의 사랑을 키워 나갔다. 처음부터 언어가 다른 두 사람은 단어의 어감 차이로 오해를 하기도 했고, 문화 차이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기도 했지만 서로의 사랑을 믿고 의지하며 2년 열애 끝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30대 초였던 둘은 가족의 지원도 없었고 벌어둔 돈도 많지 않아 투룸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결혼 후, Ryan은 학원보다 대학 근무조건이 더 낫다고 판단해 취업 조건을 맞추기 위해 온라인 교육 석사를 취득했다. 3년 후, 수경은 쌍둥이를 임신했고 책임져야 할 가족이 많아지자 Ryan은 더 열심히 일했다. 과외를 늘리고 밤낮없이 일한 덕분에 지금의 아파트로 이사 올 수 있었다. 결혼 후 지금까지 그는 가장의 무게에 여유가 없었고 지쳤다. 그래서 수경을 사랑했지만 출산 후 힘들어하던 수경을 다독일 수 없었다. 수경이 산후 우울증을 겪으며 감정 기복이 커지고 그녀의 울분을 그에게 쏟아 붓기 시작하자 Ryan으로서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두 언어를 쓰던 두 사람이 2년 동안 한 언어로 사랑을 했다. 그 사랑으로 모든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거란 용기를 내어 결혼을 했다. 남편은 가정에 책임감을 갖고 더 나은 커리어를 위해 공부와 일을 병행했고 아내는 아이를 갖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사랑 위에 3년 동안 집을 지어 올렸다. 그 집은 아주 큰 의미가 있었지만 목표가 이루어졌을 때, 정작 두 사람은 지치고야 말았다. 두 사람은 함께 나누던 한 언어를 잃어버리고 각자의 언어로 상대에게 전달했고 서로를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서로가 자신이 얼마나 큰 삶의 무게를 지고 살아가는지 비교하며 싸웠고 둘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목소리가 커질수록 상대의 말은 더 듣기 힘들었고 그 소음이 견디기 힘들어 둘은 침묵하기로 했다. 그렇게 두 언어를 쓰던 사람들은 한 언어로 사랑을 했다가 그 언어가 깨지고 다시 둘로 나뉘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거리는 두 나라처럼 멀어졌다.

수경은 아이들을 재우고 거실로 나와 스탠드 불을 켰다. 소파 옆 작은 책꽂이에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라는 제목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읽다가 끝까지 읽지 못했던 선불교 선승 다나한이 쓴 책이었다. 수경은 책을 꺼냈고, 예전에 자신이 마지막으로 읽은 표시를 해두려고 접어 둔 책 모서리를 펼치며 다음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다.

[어떤 학생이 내게 일본 히로시마의 모토마치라는 곳의 팽나무에 관한 이야기를 편지에 써서 보냈습니다. 그 나무는 1945년에 미군이 투하한 원자탄을 맞아 가지도 잎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1985년 오월 초에 싹을 틔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나무 앞의 표지판에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습니다. ‘원자탄이 이 팽나무까지도 흉물스럽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죽지 않고 오늘까지 살아남았습니다. 이 가련한 작은 나무는 삶의 힘과 삶의 가치를 알고 있었습니다. 모토마치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나무를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모토마치 초등학교 학생회-’ 이 초등학교의 학생들은 팽나무를 여러 해 동안 보호해 왔습니다. 그런데 1982년에 ‘야마노’라고 하는, 나이 많은 나무 치료 전문가가 이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수령이 많은, 이름 있는 나무들 칠백여 그루를 살려낸 것으로 유명했는데, 그는 나무를 만져 보기만 하고도 그 나무가 죽었는지,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지를 알아맞힐 수 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야마노에 의하면 나무들은 사람의 마음을 안다고 합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나무들은 조건만 맞으면 언제까지나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 팽나무의 뿌리 중에서 남아 있는 것은 한가운데 큰 뿌리 하나뿐이었다고 합니다. 그 주변의 뿌리는 다 말라죽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야마노는 그 나무를 만져 보기만 하고 곧 그 나무를 살려 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남아 있는 뿌리 둘레를 깊이 파고 영양제를 주입하고서 새 흙으로 메웠습니다. 그러고는 사람들에게 그 나무가 틀림없이 싹을 틔울 것이라고 말하고는 떠났습니다. 야마노가 말한 대로 그 나무는 싹을 틔웠습니다.

....

우리는 오로지 눈으로만 나무를 보고서, 그 나무에 대해서 이런저런 판단을 하고 그 나무가 어떻게 생명이 유지되고 어떻게 시들어 죽어 가는지 등에 대해서 이렇게 혹은 저렇게 추정을 합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무엇이 살아 있는 것이고 무엇이 죽은 것인가에 대한 우리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바윗돌이나 새 또는 다른 사람 등 모든 것에 대해 판단을 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보고 그것을 죽은 것으로 판단한다 해도 그것은 진짜로 죽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 속에 생명이 실제로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히로시마의 팽나무가 그 좋은 예입니다. 사십 년 동안 그것은 죽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사십 년 만에 꽃을 피웠습니다.]

수경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관계도 이 팽나무처럼 그 속에 생명이 들어 있다는 걸 나는 알아. 지금은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꽃 피울 수 있을 거야. ‘

남편에게 남겨질 마지막 모습이 최소한 지금의 이 모습, 이 관계는 아니었다.

이전 15화15. 생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