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준비되어야만 하는 만남

by Momanf

만나왔던 사람들과 이별해야 하는 시간에 놓인 수경에게는 부모와의 만남이 이별보다 더 힘들게 여겨졌다.

벌써 1시간째 휴대폰에 저장된 고모의 번호만 바라보며 망설이고 있었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고모가 아버지의 근황을 알고는 있을까? 내일 할까?’

수경은 고개를 저었다.

마침내 전화번호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한참 벨이 울렸지만 고모는 받지 않자 전화번호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고모, 저 수경이에요. 그동안 연락 못해 죄송합니다. 조용하실 때 전화 주세요.]

불안감은 있었지만 문자를 남겨놓고 긴장하던 가슴이 이완되며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수경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 머리를 동여 묶고 아침을 먹은 흔적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참 집 정리를 하며 긴장감을 풀고 있을 때에 전화벨이 울렸다. 고모 번호가 뜨자 가슴에서 북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여보세요?”

“아이고 수경아! 네가 연락을 다 주고~ 그동안 잘 살고 있었니?”

다행히 고모였다.

“네. 고모도 건강하시죠?”

“나야 뭐. 괜찮아. 너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니?”

“저 쌍둥이 아들, 딸을 낳았어요. 벌써 네 살이고 많이 키웠어요. 아이들 돌보며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시간이 이만큼이나 흘렀네요. 그동안 연락 한번 못 드려 죄송합니다.”

집을 나온 직후에 집 계약 문제 때문에 고모와 몇 번 통화했고 결혼한다고 소식을 알린 것이 마지막이었다.

“어머! 쌍둥이 아들 딸이라니. 너 완전 한방에 해결했구나. 잘했다. 잘했어. 사는 게 바쁘니 그럴 수 있지. 바쁘고 힘들겠구나.”

“네. 그렇지만 아이들이 예뻐서 견딜만해요.”

“그래. 남편도 잘 지내지? 아이고. 쌍둥이라니. 얼마나 이쁠까?”

고종 사촌들은 잘 지내는지? 각자의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고모는 자식들 이야기가 나오자 신이 나 한 사람 한 사람 근황을 수경에게 전했다. 둘은 그렇게 한참을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길었던 공백을 메워가고 있었다. 수경은 예의 바르게 고모의 말에 맞장구를 쳤지만 머릿속은 온통 ‘고모가 아버지의 근황을 알고 있을까?’라는 생각뿐이었다.

“너도 벌써 아이 둘 엄마가 되었다니! 정말로 정처 없이 흐르는 게 세월이구나.”

“저 고모...”

수경은 망설이다 마침내 용기를 내어 고모를 불렀다.

“응? 그래.”

“혹시 저희 아버지와 연락을 하세요?”

“아니. 우리 형제들 니 아버지 안 보고 산지 20년이 넘었지. 나야 뭐 집안 일로 몇 번 전달자 노릇하며 전화하고 얼굴 봤지만... 그것도 마지막으로 한 게 벌써 5년은 넘었을 거야. 전화번호는 있을 거야. 바뀌지만 않았으면.”

“그렇군요. 혹시 제가 번호를 좀 알 수 있을까요?”

“수경이 너 이제 니 아버지 한번 보려고 하는구나.”

수경은 잠시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네.”

수경은 그 대답을 할 수 있기까지 20년의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니 아버지도 많이 늙었겠구나. 그래도 딸인데 네 생각하면 발을 뻗고 잘 수 있었겠니? 네가 힘든 결정을 내렸구나. 잘했다. 잘했어. 니 자신을 위해서라도 꼭 아버지를 용서하고 불쌍히 여기렴. 니 아버지도 내일모레 나이 70인데 죽기 전에 너를 만나야 죽을 때 눈을 감을 수 있지 않겠니? 잘 생각했다. 수경아.”

죽을 때 눈을 감을 수 있다는 고모의 말에 수경은 눈을 감고 영안실에 누워 있는 자신을 보았다.

“한 번은 찾아뵙고 아이들과 남편 인사시키는 게 도리 같아서요.”

“내가 전화 한번 넣어볼까? 내가 가도 될 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네가 궁금하고 보고 싶구나.”

“그럼요~ 고모가 도와주시면 저야 너무 감사하죠. 저도 고모 뵙고 싶고요.”

“그래. 그럼 기다려보거라. 내가 오늘 전화를 넣어보고 네게 연락을 하마. 니 아버지 번호도 맞는지 확인하고 맞으면 전화번호를 문자로 남기마.”

“네. 감사해요. 고모. 전화 주세요.”

수경은 전화를 끊고 치러야 할 일 하나를 끝낸 것에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경은 늘 무음으로 해놓은 휴대폰을 벨 소리로 바꾸고 집안일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곧 휴대폰 문자 알림음이 울렸고 긴장하며 수신자를 확인하니 고등학교 때부터 단짝 친구인 은주였다. 수경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문자를 확인했다.

[한국에 돌아왔지? 너네 남편 학기 곧 시작하니 한국에 돌아왔을 것 같은데 언제 시간 되니? 아이들 어린이집 보내고 점심 먹을까?]

수경은 반가워서 답장을 바로 보냈다.

[그래. 언제가 좋을까? 나는 월요일이 좋아.]

[월요일 나도 좋아. 그럼 우리 중간쯤에서 만나자. 뭘 먹고 싶은지 연락해줘]

수경은 음악을 크게 틀고 다시 청소를 시작했다.

‘아버지를 만나게 될 거라는 걸 은주에게 전해주면 많이 놀라겠지?’

은주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짝으로 만났다. 복잡한 집안 문제와 아버지와의 갈등, 그로 인해 방황한 시간에 수경 곁에 있어주었고, 수경이 집을 나왔을 때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힘든 시절 은주가 아니었다면 수경은 정말로 더 견디기 힘들었을지 몰랐다. 각자 아이 둘씩 놓고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늘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었다. 18살부터 단짝 친구였기에 함께 떠올릴 추억도 많았다. 옛날이야기는 20년이 넘게 신물 나도록 했지만 매번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 놓고 대낮에 만나 맥주를 마시며 남편과 시댁 식구 욕도 하고 남의 욕도 편하게 했다. 육아로 힘든 문제를 나누며 남편이 해주지 못한 공감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스트레스가 해소되었다. 두 사람의 우정은 방전되었던 에너지를 충전하는 것처럼 여겨져 둘은 서로가 꼭 필요했다. 자신의 미성숙한 시간부터 현재의 이르기까지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너무나 잘 기억하는 친구. 수경에게 은주는 친구 이상이었다. 수경에게 은주는 친정이었다. 아이들을 키워놓고 10대, 20대처럼 자주 만나고 여행하며 신나게 놀아보자고 무수한 약속을 해두었다.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 만날 때마다 아쉬운 발걸음으로 각자의 지친 삶으로 돌아갈 때면 언젠가 이루어질 그날의 약속을 상기하며 힘을 내기도 했었다.

수경은 덜컥 겁이 났다. 결국 그 약속은 이루지 못할 꿈이 되었고 본의 아니게 일방적으로 약속을 깨게 된 것에 사과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린 각자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하지 못한 것들을 아쉬워했지. 아이들이 다 크면, 크고 나면 그 모든 것을 다 하자며 다음, 또 다음을 약속했었지. 우리는 평생 아무 일 없이 살 것을 당연히 여기며 그런 약속들을 했었더랬지. 그 약속을 해두고는 지친 현재를 다독이며 언젠가는 보상받을 것이라 마음을 놓고 살았다. 지금 못해도 다음이 있다고 꼭 해야 할 일을 미뤄두거나 자신의 욕구를 억제하기도 했다. 우리는 무리해서라도 여행을 다녀와야 했었는데.... 다음이란 것은 희망과 동시에 변명이 되었고 이제 내게 다음이란 것은 없다. 이제 그 많은 약속들은 지켜지지 못할 그저 가볍게 해대던 말로만 남게 되었다.’

수경은 문득 은주와의 약속을 3일 뒤인 월요일로 잡아둔 것을 기억하며 헛웃음이 났다. 또 당연한 것처럼 월요일이 꼭 거기 있어주리라고 생각하고 약속을 잡았던 것이다. 이미 자신에게 ‘나중’은 아주 오랜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런 생각에 미치자 아버지를 당장 내일이라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경은 Ryan에게 주말 동안 천천히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터놓고 마음에 준비를 하려고 계획했었지만 더 이상 다음으로 미루고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

‘마지막 인사를 건네야만 하는 보고 싶은 사람들을 빨리 만나자. 망설이며 아까운 시간을 흘려보내지 말고 바쁘게 만나자. 그냥 만나자. 내 마음에 있는 두려움 걱정 때문에 시간을 놓치고서 후회하지 말고 단순하게 생각하자. 서로의 잘못을 따지고 미안하다는 말을 기대하고 용서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런 복잡한 생각들을 그만하자. 그저 나를 이 세상에 낳아줬기에 좋은 남편을 만나 가족을 이루었고 아름다운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음을 감사하자. 힘든 유년시절을 겪고 혼자 독립했기에 정신력이 강하게 단련된 거라고 말하자. 부모의 그늘 아래서 성년이 될 때까지 정규 교육을 받고 집 지붕 밑에서 잠들고 밥 먹었음을 감사하자. 비록 내 시간은 짧지만 부모가 아니었다면 이토록 치열하게 내 삶을 잘 꾸려내지 못했음에 감사하자. 힘들었기에 세상이 더 아름답게 보였고 더 즐거웠고 더 맛있었다고 말하자. 그리고 죽음이 나를 더 많이 가르쳐 주었다고 결코 후회하지 않는 삶이었다고 마지막 인사를 전하자.’

깊은 생각에 빠진 덕분에 청소는 수월하게 끝났고 수경은 샤워를 시작했다. 샤워를 마치고 따듯한 차를 내려 마시며 휴식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고모였다. 이제 아버지를 만나 해야 할 말이 명확해지자 수경은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고모”

“수경아. 니 아버지랑 통화했다. 너네 새엄마랑 글쎄 우리 동네에서 갈빗집을 하고 있더구나. 지척에 두고도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하고 살았다니 내가 기가 다 막히더라. 하여간 니 얘기를 전하니 네 아버지도 놀랍고 반가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어. 내일이라도 네가 시간이 되면 당장이라도 괜찮다고. 저녁 장사가 바쁘니 네가 오전 일찍 들린다면 좋다고 말하더구나.”

“네 고모. 저도 내일 오전이 좋아요.”

이제 준비된 수경의 마음에 거릴 낌은 없었다.

“주소와 전화번호를 제게 남겨주실래요? 아이들 준비시켜 11시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고모도 꼭 오세요. 감사해요.”

“그래. 나도 네가 너무 보고 싶다 얘야. 아이들도 보고 싶고.”

그렇게 전화를 끊고 수경은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다시 내쉬었다.

‘그래도 20년 만에 인사를 가는 건데 뭐를 준비해 가야 하나?’

아버지가 좋아하는 게 뭔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가 마시던 소주병만 기억났다.

60대 아버지 생신 선물.

한 번도 챙겨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선물이 막연해 휴대폰을 열어 검색창에 그렇게 입력해 보았다. 목록들이 뜨고 수경은 그것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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