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일기 3
[2020.9.11
초등학교 1학년, 보리와 준이에게.
초등학교 입학을 축하해. 내 딸, 내 아들.
학교는 그동안 다니던 유치원과는 많이 다르지?
새로운 선생님과 친구들이 낯설었니? 부끄러웠니?
교실에 똑바로 앉아 수업을 들어야 해서 많이 힘들었지?
수업을 하다가 아빠가 보고 싶었니? 엄마 생각이 났니? 집에 가고 싶었지?
울고 싶기도 하고 친구들이 놀릴까 봐 울음을 참기도 했니?
우리 아기들 얼마나 힘들까? 힘들 때는 아빠에게 이야기해보는 것이 좋아. 처음에는 많이 힘들겠지만 학교에서 좋은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나면 정말 재밌어질 거야. 우리 보리와 준이가 진짜 큰 형아, 언니가 되어 선생님께서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준비하셨으니 한번 잘 들어봐.
그리고 비밀 하나 알려줄게. 다른 아이들 엄마는 다 집에 있지만 준이 보리 엄마는 너의 심장에서 살고 있어서 너희들이 가는 어디든지 함께 있단다. 엄마가 했던 말 기억하지? 너희들이 슬프거나 아프고 힘들 때, 엄마가 곁에 있다는 걸 꼭 기억하렴. 문득 바람을 느낀다면 엄마가 너희들 잘하고 있다고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는 거란다. 가끔 날고 있는 새를 본다면 엄마가 너희들에게 용기 내라고 날갯짓으로 힘차게 응원하는 거란다. 엄마가 늘 곁에서 너희들을 지켜 봐줄게. 우리 준이 보리, 즐겁게 학교 생활하렴. 사랑해.]
‘아이들은 매일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겨우 일어나 학교에 적응할 때까지는 힘들어하며 다니겠지. 조그만 등에 큰 가방을 메고 낯선 교문을 들어서야만 하겠지.’
조그만 아이가 등에 짊어질 큰 가방을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짠해졌다.
‘그 가방을 메어주고 받아 줄 엄마가 없을 우리 보리와 준이, 비가 오면 우산을 들고 기다려 줄 엄마가 없을 우리 아이들.... 아니야. 아니야. 아이들에게 그 누구보다 최선을 다할 아빠가 있잖아. 고모들도 있고, Julie가 엄마가 되어 줄지도 모르잖아. Ryan에게 마음 고운 여자가 생겨서 우리 아이들의 좋은 엄마가 되어줄 수도 있어.’
수경은 절망으로 무너지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 잡으며 다시 펜을 들어 일기를 써 내려갔다.
엄마의 노트 4
[중 2병에 걸린 보리 준이, 안녕~]
제목을 적고 보니 괜스레 코끝이 찡해진 수경은 눈물을 머금고 그때의 아이들을 상상했다.
[하루 종일 네가 하고 싶은 것만 했으면 좋겠지? 더 이상 너희들은 어린이가 아닌데 어른들이 자꾸 간섭하고 잔소리하는 것 같지? 아빠의 말이나 선생님이나 어른들이 하는 말들이 듣기 싫지? 어른들이 네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 너도 속상하지? 때론 어른들의 말이 논리적이지 않고 납득이 가지 않을 때도 많을 거야. 엄마가 이렇게 너희들을 훌쩍 떠나버려 너희들이 인생이 이렇게 고달픈 거라 엄마를 원망하기도 할 거야. 잠을 자려고 누워도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들이 떠오르겠지. 문득 죽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죽는다는 고정된 사실이 무섭기도 할 거야. 왜 공부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공부하기도 싫어. 그렇지? 너희들이 좋아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밤새도록 수다를 떨거나 게임만 하고 싶기도 하겠지.
술이 어떤 맛일까 궁금하니? 너희들이 읽고 있는 책이나 보고 있는 영화나 드라마, 혹은 하고 있는 게임의 주인공이 된 상상을 해 본 적 있니? 너희들은 크면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자꾸 되고 싶은 사람이 바뀌기도 하고 뭘 잘할 수 있을까 망설여지지? 너희들도 이제 어른처럼 생각할 수도 있고 무엇이든 잘할 수 있는데 어른들이 아직도 너희들을 아이 취급하며 무시한다고 여겨질 때도 있을 거야. 엄마는 지금 너희들이 느끼는 모든 감정을 다 이해한단다. 물론 아빠와 선생님, 고모들, 네 곁에 있는 어른들도 다 이해할 거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냐고? 우리 모두가 겪은 일이었으니까. 지금 너희들의 몸은 어른의 몸으로 변하고 성장하고 있어. 학교에서 배운 많은 지식들로 세상을 다 안다는 생각도 들기에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어른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살고 싶다는 것은 이맘때 누구나 가지는 생각이란다.
엄마가 살아보니, 또 이 세상에 있는 어른들이 살아보니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들이 있어. 사람은 죽을 때까지 성장하며 살아간다는 거였어. 학교 밖 세상은 너무나 다양하고 넓어서 어른인 우리조차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이라는 걸 깨달으며 살아간단다. 엄마도 중학교 때는 너희들처럼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하며 어른들이 가끔 어리석게 보였어. 하지만 고등학교는 또 새로운 세상이었고 대학을 들어가니 완전히 다른 세상처럼 여겨졌어. 그때쯤 나는 정말로 성인이 되었고 내가 모든 일을 통제할 수 있다 생각했지만 직장 생활을 하니 모든 것이 다시 새롭게 배울 거리들로 가득 찼지. 그리고 내가 생각하던 세상과는 또 많이 달랐어. 또 힘든 시간을 보내며 이제는 완전한 어른으로 거듭났다 자부했었다. 그런데 웬걸? 결혼을 한 후의 세상이 또 다르고 아이들을 낳고 기르니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거야. 그때마다 엄마는, 우리 어른들은 당황했고 아직도 이 세상과 삶에 대해 모르고 있는 사실이 많음에 절망했지.
엄마는 서른아홉이지만 시한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지금까지 약 4개월 동안 또 많은 걸 깨닫게 되었단다. 그러니까 죽음을 앞두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이 또 따로 있더라고. 이렇게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엄마처럼 젊을 수도 있고 나이 든 노인일 수도 있는데, 죽음 앞에선 사람들만이 깨달을 수 있는 것들이 반드시 있단다.
그러니 이제 겨우 열네 살, 열다섯 살인 너희들이 어른들 눈에는 한참 어린아이로 느껴지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니 이해해 줄 수 있겠니? 아직 우리 보리와 준이가 14세, 15세만큼의 세상만 배운 거라 네가 모르는 더 큰 다양한 세상이 있다는 걸 이해한다면 어른들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너희들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아직도 네가 잘 모르는 거친 세상에서 너를 이끌어주고 보호해주고 싶어 아빠나 어른들이 너희들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지시하거나 부탁하는 거란다. 때론 아빠는 지금 당장은 너희들과 충돌하고 싸우더라도 너희들이 원하는 것만 들어주지는 않을지도 몰라.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너희들을 가장 사랑하는 아빠는 궁극적으로 너희들 인생에 더 도움이 되는 길, 더 좋은 길을 걷게 하려고 그리로 이끌 테니. 너를 가르치는 선생님도 그렇고 네 고모들도 너희 주변의 어른들은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그들이 겪은 경험치로 너희들을 안전한 길로 이끌기 위해 노력하는 거란다. 그래서 엄마는 너희들이 그들을 좀 믿어주길 바래. 때론 정말 중요한 것은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기도 하거든. 너희들이 잘 이해하지 못해도 어른들이 이미 살아온 세상, 거기에는 공통점이 있기에 가끔 어른들의 충고를 한번 더 생각해 봐주기를 바랄게.
그렇다고 엄마는 너희들이 그 충고만을 따라 안전한 길만 걸으라는 건 아니야. 세상은 넓고 다양해서 우리 어른들도 일부만 알고 죽어. 이 세상에 완전한 정답은 없단다. 그래서 어른들도 계속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지. 엄마가 원하는 건 너희들이 다양한 어른들의 의견을 열린 자세로 들어보고 너희들의 의견도 공유했으면 좋겠어. 그 속에서 너희들에게 가장 좋은 것들을 판단하고 선택해 살기를 바랄 뿐이야. 중요한 것은 네가 하는 그 어떤 선택에는 반드시 그것에 따른 결과가 주어진단다. 그리고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진짜 어른이 된다는 것이란다. 이제 너희들은 그런 어른이 되는 것을 준비하는 나이가 된 거야.
보리 준이가 지금 질풍노도의 시간이라는 사춘기를 맞고 몸과 마음이 성숙해지는 걸 지켜보는 아빠와 너희 가슴속에 살고 있는 엄마는 너희들이 너무나도 자랑스럽다. 엄마 아빠의 아름다운 아이들이니 진정으로 멋있는 어른들이 될 거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아. 번데기 안에서 애벌레가 나비로 만들어지 듯, 지금 번데기 안에 있는 이 시기에 다양한 책을 읽고 많은 어른들과 대화하며 치열하게 너희들 자신을 만들어 가보렴. 너희들만의 고유한 색과 무늬의 날개를 가진 나비가 되어 인생을 훨훨 날아다닐 우리 보리, 준이를 응원한다.]
엄마의 노트 5
[수험생 우리 준이, 보리
이제 정말 네 인생에 첫 중요한 시험이 놓여있네. 우리 준이 보리 그동안 고생 많았다. 오랜 시간 사각형 학교 안에서 매일 스케줄에 맞춰 공부하고 출석하느라 정말로 애썼다. 이제 정말 너희들의 꿈을 위해 진짜로 공부하고 싶은 걸 결정하는 시간이 되었구나.
그 어떤 선택을 하든 여기까지 온 너희들이 너무 자랑스럽다. 이 한 번의 시험이 너희 예상보다 결과가 좋지 못해도 실망하거나 걱정하지 않기를 바래. 언제나 차선의 여지가 있고 때론 불행처럼 보이는 일이 더 나은 새로운 문을 열어주기도 하거든. 학교를 다니는 동안 선택이 잘못됐다 여겨지거나 혹은 졸업 후에도 네 선택이 잘못되었다 여겨지면 언제나 바꿀 기회가 있단다. 그러니 너무 큰 부담감을 갖지 말길 바래. 인생이 재밌는 것은 잘못된 선택이 네게 기회를 주기도 하고 좋아 보이는 선택이 실상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거야. 어떨 때는 알 수 없는 운명이 너를 이끌기도 해. 그 어떤 결과든 항상 바꿀 수 있는 기회와 방법이 많으니 대학 입학시험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지 마. 결과와 상관없이 네 스스로가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에 만족할 수 있길 바래. 어떤 일이든 노력은 네 몫이지만 결과는 네 손에서 벗어난 일일지도 모르거든. 살다 보면 너도 알겠지만 네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있고 네 영역 밖의 일이 있는데 과정과 결과가 그런 것 같아. 그러니 네 영역 밖의 일에서는 과감히 미련 갖지 말기를 바래. 노력을 다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니 실망하지 않길 바래.
인생에는 늘 그렇듯 지금처럼 크고 작은 시험의 순간들이 있단다. 언제나 선택은 네 몫이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것도 너에게 달려있지. 결과는 앞서 말한 대로 너의 영역 밖이라 네가 예상할 수가 없을 거야. 노력만큼 좋은 결과가 따라오기도 하고 어떨 때는 배신감을 느낄 만큼 결과가 좋지 않을 때도 있을 거야. 하지만 노력을 충분히 하지 않았는데 좋은 결과를 얻어 행운처럼 여겨질 때도 있단다. 또 가끔 실패했는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서, 돌고 돌아 원하던 목적지에 다른 방법으로 닿기도 하고 어떤 것은 아무리 애를 써도 신기루처럼 절대로 닿지 않을 수도 있어. 때론 네가 잊어버리고 살았는데 지나고 보면 이미 그 결과를 얻었음을 깨닫기도 하고 어떤 것은 거듭되는 실패에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지라도 그 열정이 사그라들지 않아 결국 생각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기도 한단다. 이렇듯 결과라는 것에는 다양한 변수가 많으니 결과에 너무 집착하지 말기를 당부한다. 시험의 결과로 winner나 loser로 규정짓지 마.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려고 엄마가 꾸며낸 말이 아니라 엄마가 살아가면서 깨달은 경험이야. 그러니 네가 어떤 시험을 치르듯 엄마의 당부를 잊지 말고 살아가길 바래. 이건 너무 중요하기에 몇 번이라도 강조하고 싶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네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지만 네 힘이 미치는 것은 50%, 네가 할 수 없는, 네 능력 밖의 소위 운명이라 여겨지는 일이 50%란다. 그러니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잘 구별해서 네가 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미련을 버리고 네가 할 수 있는 부분에만 집중했으면 좋겠어.
그래서 엄마가 생각하기에는, 애초부터 100점에 기준을 놓고 평가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 같아. 네가 할 수 있는 50점에 최선을 다했다면 결과가 좋지 않아도 너는 네게 만점을 줘야 해. 그리고 네가 바라는 결과를 얻지 못할 때는 결과가 좋지 않은 지점부터 다시 재도전하거나 계획 전체를 수정하거나 전혀 다른 기회에 도전해보면 좋을 것 같아. 네 영역에서 이미 최선을 다했고 배운 것이 있기에 그 실패조차도 분명 네게 큰 가르침이 되었을 거야. 그렇게 예측할 수 없고 네 마음대로 되지 않기에 인생이 또 재미있는 거겠지.
엄마의 말을 우리 준이, 보리가 완전히 이해했으면....
고백하자면 엄마가 이 진실을 너무 늦게 알아버려 실망하거나 좌절하고 슬퍼하고 누군가를 원망만 하며 흘려보낸 시간이 너무 많았어. 그 귀중한 시간들이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아까워. 최선을 다했지만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때면 나 자신을 Loser로 부르며 비난하기 바빴단다. 나에게도 노력 하나 기울이지 않고 얻은 수도 없이 좋은 것들이 많았지만 그것들에는 관심도 없었고 감사한 마음도 없었지. 너무 당연하게만 생각했었단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내 영역 밖의 일에만 마음을 쏟아 질투하고 세상이 불공평하다 원망하기 바빴단다. 사실 그러느라 내 생의 대부분을 낭비한 것 같아 너무 후회가 돼. 지금 내 인생을 돌아보면 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얻은 엄청난 행운들이 참 많았는데 말이야.
부모로부터 독립해 영어를 전혀 못했음에도 영어 학원에서 일하게 된 것도, 그곳에서 영어를 배우고 영어로 돈을 벌고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영문과에 편입해 뒤늦게 캠퍼스를 만끽했었던 것과 너희들의 아빠를 만나 사랑하게 된 것도, 영어가 내 생활이 되기 시작하면서 너희들의 아빠와 사랑을 이루어 가정을 이루었던 것도, 꿈만 꾸었던 해외여행을 아빠와 함께 하며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낸 것도 모두 행운이었어. 가족이 없는 엄마에게 특별히 좋은 친구들이 많았고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난임으로 힘들었지만 기적같이 한 번에 예쁜 아들, 딸, 우리 보리 준이를 얻은 것도, 너희들이 아주 예쁘고 건강하게 잘 자라준 것도 다 엄마에게는 내 노력만으로 만 설명할 수 없는 행운들이란다.
비록 시한부 인생을 살지만 죽음을 통해 내가 가진 이 모든 것을 깨닫고 감사할 수 있음에, 엄마를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깨달았고, 어릴 때 미워하던 나의 부모를 미성숙했던 인간으로 이해할 수 있었음에,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그들을 다시 만날 용기가 주어졌음에, 그리고 남은 시간 사랑할 수 있음에 엄마는 죽음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어.
이렇게 생을 마감할 수 있는 일 또한 엄마에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이젠 감사해. 아마 엄마가 할머니까지 살았더라면 이런 진실을 깨닫지 못하고 시간을 낭비하며 살고 있을지도 몰라. 그런 점에서 엄마에게 놓인 이 마지막 시험인 죽음은 엄마가 최선을 다해 풀어낸 문제라 결과에 상관없이 엄마는 만족한단다.]
수경은 여기까지 쓰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글에 동의했다.
누군가는 수경의 삶이 너무 짧다고, 긴 삶을 살아내지 못해 나쁜 결과를 맞았다고 인간의 영역 밖의 부분까지 넣어 쉽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니 자신이 할 수 있는 50%에 최선을 다해 살았고 실패와 좌절로부터 깨달은 보물과도 같은 지혜들을 아이들에게 전달해 줄 수 있어 가슴에는 감사로 벅차올랐다. 마지막 시험대인 죽음 앞에서 자신에 대한 평가는 만점이었다.
[보리야. 준이야.
네 스스로가 만족한다면 넌 이미 만점이야. 고생했어. 엄마는 네가 정말 자랑스러워.]
수경은 펜을 놓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죽음이라는 마지막 시험 문제를 접했을 때의 당혹감을 자신이 이미 극복한 사실을 깨달았다. 죽음의 공포, 혼자 남겨질 두려움과 남겨질 사람들에 대한 걱정과 미안함, 죄책감과 슬픔의 항목들을 간신히 뚫고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인생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에 접근해 나가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문제까지 잘 풀어내리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고통스러운 암이라는 문제에 가족들과 여전히 살아 있음에 감사한다는 정답지를 쓰고, 시간의 한계라는 문제에 그동안의 삶을 되돌아보고 용서하고 해결할 수 있는 기회라는 답을 달자. 남겨질 내 어린아이들과 가족, 친구들과 헤어진다는 문제에 죽음과 동행하기에 깨달은 삶의 진리를 내 사랑하는 이들에게 전해줄 수 있음에 행복하다 정답지에 쓰자.’
그 순간 수경은 아픈 몸으로부터의 자유,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야 한다는 슬픔에서의 자유를 느꼈다. 부족하다 여겼기에 무언가를 추구하며 살았던 과거, 알 수 없는 끊임없는 원인과 결과의 연속에 매달려 보이지 않던 자신은 이미 완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경은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고 크게 공기를 들이마시며 비상하는 새처럼 양손을 허공 중에 뻗었다.
절대로 끝이 없다는 상상 속으로
끝이 없는 우주 속으로
끝이 없는 사랑 속으로
완전히 자유롭게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