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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manf Dec 31. 2023

86. 세상의 빛


요한복음 8장은 음행 중에 잡혀 온 여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 이야기에서 화난 군중은 음행 중에 잡혀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여자를 끌고 와 예수님을 시험한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요한복음 8:5)

특이한 것은 예수님이 이때, 두 번이나 몸을 굽혀서 땅에 무언가를 쓰시는데 처음에는 도대체 무엇을 쓰셨을까? 궁금했는데 언젠가부터 시선을 거둬주시는 주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난 군중들이 그 여자를 노려보고 있을 때, 주님께서 갑자기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 군중들이 일제히 예수님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때, 그 여자가 잠깐 한숨 돌릴 수 있지 않았을까? 엄청나게 비난하는 그 사람들의 숨 막히는 시선으로부터 잠깐 벗어날 수 있었던, 그 순간을 거둬주신 예수님.

나는 그것에 큰 감동을 받았다.

사람들이 거듭 되묻자 마침내

 “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신다.

그리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는 행위를 반복하신다.

남을 정죄하는 시선을 거둬 예수님께로 향하게 하시고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신 후, 그 시선을 자기로 향하게 하신다.

주님은 이렇게 시선을 바꿔주신다. 그리고 우리의 시선이 닿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지 정확히 알게 해 주신다.


다른 사람에게 향한 시선은 간음한 여자에게 향한 사람들의 시선과 닮았다. 우리는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고발하고 심판하려는 시선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

그 시선이 1단계, 예수님께로 향하면,

 “그렇다면 예수님이 저 자를 벌해주세요. 저는 옳지요? 저는 저 사람보다 낫잖아요? 저를 의롭다고 말해주세요. 저 사람보다 낫다고 말해주세요.”

하는 시선이다.

2단계, 나를 향할 때,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한복음 8:9)

우리 모두는 마침내 깨닫는다. ‘우리와 음행한 여자가 같은 죄인이구나. 죄에 경중을 따질 것 없이 우리 모두 다 죄인이다. 내가 정죄할 군번이 아니구나.’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심판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돌로 칠 수 있는 그분이, 이 세상에 정죄하실 수 있는 단 한분이 그가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8:10-11)

이 장면은 창세기에서 벌거벗은 아담과 이브를 위해 가죽옷을 입히신 주님과 오랫동안 걷지 못하는 환자들에게 자리를 털고 걸어라.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하셨던 많은 표적들과 겹친다.


그리고 이어지는 요한복음 8장 12절,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바퀴벌레는 어두운 데서 스물스물 기어 다니다가 빛이 비치면 쏜살같이 어두운 데로 기어들어가 숨는다.

우리 안에 우리가 알고도 짓는 죄, 무의식 중으로도 짓는 죄를 바퀴벌레로 생각해 본다. 선악과를 먹고 옳고 그름을 쉼 없이 판단하는 우리의 죄성과 믿는 중에도 레벨을 붙여 교회나 신앙인들끼리도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낫지, 저 사람은 왜 저래?’ 하며 끊임없이 판다 하고 정죄하며 자기의를 높이고 드러내는 자신의 죄를 알지도 못하고 사는 우리들. 그 생각과 마음을 모두 바퀴벌레로 생각해 봤다.

말씀의 빛이 비칠 때, 자기 합리화의 뒤로, 자기변명 뒤로, 또 남을 비난하는 것으로 위안 삼는 뒤로, 그 모든 것으로부터 숨어드는 우리들 모습. 발가벗고 수치스러운 모습을 가리려고 아무것이나 일단 가리고 숨기고 보는 우리들 모습을 생각해 본다.

교묘하게 다른 사람 위하는 척하면서 결국 자기의 의를 드러내며 우회적으로 비난하며 죄성을 숨기는 내 모습을 본다. 상대방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현란한 단어들로 포장해 내 죄성을 감추고 모든 수치와 비난을 남에게 돌리며 ‘내가 너보다 낫지, 내가 더 의롭고 착하고 좋은 사람이지.’를 마음속으로 비난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에게 만족하는 내 자신이 비열하다.


민수기 21:4-9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 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예수님을 통해 빛이 들어 어둠속에 있는 내 죄가 비칠 때, 우리는 그 죄와 마주하기 힘들다.

민수기에 나오는 불뱀들은 주님이 빛으로 비춰 우리 죄가 드러날 때, 우리 안에 있는 죄성 바퀴벌레처럼 도망가는 우리를 무는 불뱀이다.


불뱀에 물리고 죽게 되자 여호와를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떠나게 하소서 하며 다시 주님 앞에 매달린다.

나를 아프게 한 그 불뱀은 꼴도 보기 싫고 고통을 준다. 하지만 너무 아프고 곧 죽게 된 우리는 주님께 매달려 기도한다.

주님의 방법은 모세에게 그 불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달라고 말씀하신다.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산다고 하신다.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자기를 아프게 한 그 불뱀을 꼴도 보기 싫고 보기만 해도 몸서리치게 싫은 그 불뱀을 마주하라니. 또 다치게 할 것이라는 불안과 공포가 있는데 그 뱀을 쳐다보라니.


그 불뱀이 우리가 아는 우리의 수치, 우리의 죄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놋뱀이 달린 막대기처럼, 예수님도 우리의 죄로 십자가에 달리셨고 우리의 죄사함은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 죄를 바라봐야 한다는 뜻이었다.

십자가=예수님의 죽음=우리의 죄.

우리 죄를 아프게, 몸서리치게 불편하게 봐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낫는다.

도망가지 않고 주님 비추시는 빛 앞에 가져 나와야 한다. 어두운 내면으로, 다른 것으로 덮으려고 하지 말고 그게 무엇이든, 나를 아프고 불편하게 하는 모든 죄를 직면해 봐야지만 치료받을 수 있다.

죄책감이 얼마나 아픈가? 수치가 얼마나 숨고 싶은 고통인가? 절망으로 그냥 홀로 어둠 속에 머물고 싶기도 하고 너무 아파서 직면하기 조차 싫은 내 수치와 죄를  모두 짊어지고 죽으신 예수님. 그 예수님을 봐야 한다.

예수님이 그렇게 죽고 말았다면, 우린 이 죄책감으로 아프고 끝이 났을 것이다. 그럼 살아있는 날 자체가 고통으로 끝날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주님이 그 죄와 함께 모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부활하셨다.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방법으로 그 모든 나의 수치와 죄를 사해주시고 의의 옷을 입혀주시며 나를 구속해 주셨다.

육신 안에 갇혀 매일 죄를 짓게 될 존재지만 십자가를 보며 자기의 죄를 바라보는 인간으로 변하고 그것을 바라보며 죄책감만 느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용서받았다는 사실과 내가 치유되고 있다는 사실, 내 힘으로는 절대로 안되지만 주님께 기도하고 의지하면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경험하게 된 것이다.


십자가를 통해 ‘나는 죄인이다. 나는 안된다. 난 다치고 아프고 고통받았다.’를 알고

부활을 통해 ‘죄인인 나에게 주님도 정죄하지 않으신다고 하셨다. 또 기회를 주셨고 죽을 때까지 이 기회는 계속된다. 이렇게 구원을 아무 값 없이, 자격 되지 않는 자가 받았고 이런 사랑과 용서로 구속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매일 알고 바라보고 깨닫고 그래서 감추고 싶은 죄를 피하지 말고 주님 앞에서 드러내고 그렇게 치유받고 주님께 기대면서 내가 주인이 아니라 주님이 주인 되심이 진정한 치유과정이고 나에게 유익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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