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은 타임머신이며 두 번째 기회이다.
자신으로부터 잉태된 한 생명을 제대로 보호하고 양육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를 낳은 이상 부모로서 그 자리를 절대로 떠나면 안 된다는 무언의 언약이며 계약이다.
하지만 한 인간이 성숙해져 가는 과정은 각기 다른다. 한 사람에게 역할이 주어졌다고 해서 그 역할에 맞는 적당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되지 못한다.
나는 그것을 결혼 후 6년 만에 엄마가 된 지 2년 만에 깨달았다.
아내도 엄마도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엄마라는 이름이 그랬다. 아이를 낳고 자연스레 엄마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지만 그 역할에 맞는 마음가짐과 행동을 갖춘 것은 2년 후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지치고 힘들었다. 나만의 시간 나만의 공간이 모두 희생된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내 삶에 중심이 되니 나는 아무것도 편안히 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예전처럼 비싼 장신구나 옷, 나만을 위한 여행은 모두 사치가 되었고 뭔가를 하고 싶어도 아이들 자는 시간에 겨우 할 수 있었다. 나는 아이들이 지치고 버거울 때가 많았다.
특히 나만 이렇게 희생하는 것만 같다는 피해의식은 고스란히 남편에게 전달했다.
돌이켜보면 남편도 나처럼 하루아침에 아빠가 되지 못해서 실수투성이에 서툴렀을 텐데 나는 나 혼자 애쓰고 있다고 했다. 그를 이기적이라 비난하고 아빠로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로 상처도 주었다. 그때는 그의 모든 것이 싫었다. 그저 비난하고 꼬투리 잡기에 바빴고 매일 짜증이나 화가 난 상태였다. 나는 아내로서도 미성숙한 인간이었다.
미성숙한 부모는 아이가 자기 발목을 잡는 존재로 여겨지고 자신이 희생한다고 생각하기에 삶이 지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아이에게 소리 지르고 남편에게 그 화를 퍼붓고 결국에는 그 자리를 떠나버리는 이들도 있다.
그 자리를 떠나 자신이 낳은 아이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줘 그 아이의 평생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착각이다.
진실은 자신으로부터 잉태된 생명은 우리 내면을 비추는 거울을 낳은 것이다.
우리의 모습으로 우리를 닮고 우리를 비추며 우리가 하는 말을 하고 행동을 한다.
아이는 부모에게 기르는 과정에서 부모 자신의 모습을 상기시키고 자신이 의식하지 않았던 내면 깊은 곳의 문제를 수면 위로 떠올린다. 그리고 갈등을 겪으며 그것을 탐색하고 감정과 생각으로 휩싸인 시간들이 지나면 그것의 답을 찾게 된다. 그리고 발견한다. 자신의 내면에 미성숙한 아이가 단계별로 자랄 때, 그 당시 내 부모의 무지나 미성숙함으로 충족되지 못했던 부분을.
인간의 발달 과정에 꼭 필요했던 내 부모로부터 충족되지 못한 발달 애정과 관심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 부모가 보여줬던 가정 폭력과 감정을 다룬 서툰 행동과 언어들을 내가 습득해왔다는 걸 발견했다. 내 부모의 미성숙한 자세로 나는 내게 어른의 모델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를 기르는 것은 겪어왔던 아픔, 여전히 남아 있는 아픈 기억으로 인한 자기 방어, 그래서 그 습관들이 형성되었고 성격이 된 내면의 문제를 이끌어내 문제와 마주하게 한다.
아이를 통해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깨닫고 이해한 부모는 이제 자신이 그 발달단계에서 뭐가 충족되어야만 했었고 부모에게 무엇을 바랐는지 생각한다.
이제 그것에 집중해 내 아이에게 그것을 해줌과 동시에 나의 아이가 뭘 원하는지 귀를 기울일 자세가 되어있다.
그러한 자세로 아이를 양육하는 것은 사실 자신의 마음속 아이를 치유하는 좌정이다.
이러한 이유로 사실 자식은 내 삶을 희생시켜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존재가 아니다.
내 속에 울고 있던 오랜 시간 방치되었던 어린아이에게 왜 우는지 질문을 시작으로 그 아이를 이해하고 달랠 수 있다. 결국 그 아이는 울음을 멈추고 웃는 얼굴로 내 자식의 얼굴에 비쳐 나는 내 속의 어린아이 다루듯 내 아이를 다룰 수 있다.
결국 내 눈앞에 놓인 내 자식을 통해 나 자신의 내면을 치료할 기회를 얻는 셈이다.
자식은 부모에게 그래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타임머신을 타고 다시 어린 시절로 보내주는 존재. 진정으로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는 세컨드 챈스이다.
성숙한 부모 미성숙한 부모의 차이는 이 사실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