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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Jun 23. 2021

#20 관찰, 감탄, 향유

브런치에 걸어둔 내 프로필 사진은 영화 ‘문라이즈 킹덤’의 한 장면이다. 여주인공 수지는 망루 위에서 쌍안경으로 정면을 응시한다. 나는 이 이미지에 나 자신을 투영한다. 나의 정체성 중에는 관찰하는 사람이 있다. 행동하고 사건을 발생시키는 주체이기보다는 한 발짝 떨어져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물론 수지가 저기서 일반적인 관찰을 하고 있는 건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존재할 때 가장 편안하다. 친구 스티븐 시벌이 이미 스무살에 나라는 인간의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심지어 나보다 먼저 그가 알아냈다) 가끔 소름이 돋는다.


관찰 중에서도 내 전문분야는 장점을 포착하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의 좋은 면을 쉽게 찾아내고 높이 산다. 솔직히 말해서 고슴도치에서도 장점을 찾을 수 있다. 그 정도로 이 방면에 소질이 있다. 예술을 대상으로 장점을 찾는 눈이 작동하면 감상행위를 통해서 대상을 음미하고 자주 감탄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사랑하는 마음’을 쓰면서 마침내 내 타고난 재능talent을 발휘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영화 ‘마지막 4중주’에는 현악 4중주단의 수장인 첼리스트 피터가 수업 중 학생들에게 카잘스 일화를 들려주는 장면이 있다. 피터가 젊어서 카잘스에게 마스터 클래스를 받았는데 최악의 연주에 카잘스는 칭찬만 했다는 것이다. 훗날 카잘스와 재회한 피터가 엉망인 연주에 왜 칭찬만 했냐고 묻자 카잘스는 특정 부분을 거론하며 그 부분이 정말 좋았다고, 혹평은 멍청이들에게나 맡겨두라고 말했다고 회상한다. 실제 일화인지는 모르겠고, 카잘스의 다른 마스터 클래스를 보면 늘 좋은 점만 말하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나는 카잘스의 말을 이해한다.


장점에 주목하는 눈 덕분에 나는 사는 게 재미있고 신난다. 지나가는 음악 한 소절이나 스쳐가는 그림에도 들뜰 수 있다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나는 나를 기쁘게 하는 쉽고 즉각적인 수많은 방법을 알고 있는 셈이다. ‘사랑하는 마음’ 서문에 쓴 것처럼, 나는 균형을 담보하지 않는다. 아쉬움이나 모자란 부분에 대해 말할 의무도 의지도 없다. 그런 건 누군가 다른 사람(멍청이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업으로 삼을 것이며, 괴롭고 더럽다고 숭고하지 않은 일은 아니다)들이 충분히 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순수한 아마추어로서 말의 어원에 충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이면 된다. 게다가 나는 잘 감탄하는 소질 덕분에 쉽게 자주 널리 사랑에 빠진다. 모든 게 다 좋고 완벽해서가 아니라 어떤 한 조각이라도 와닿는 게 있다면 나는 언제든 사랑에 빠질 것이다(그렇다고 모두를 사랑하는 건 아니지만 애초에 싫어하는 마음에 대해 쓸 필요가 없는 기획이다).


내 자질이 경제적인 여유와 결합했다면 나는 페기 구겐하임이나 거투르드 스타인처럼 예술품을 사들이고 예술가들을 후원했을 것이며 그들을 위한 살롱을 운영하는 것으로 내 재능을 꽃 피웠을 거라고 자주 생각하곤 한다. 뭐, 재능이 늘 만개하는 건 아니니까.


아마추어적인 예술 애호가에게는 내가 가진 자질이 장점처럼 느껴지지만 생활인에게도 그런지는 의문이다. 진화론적으로는 장점을 보는 눈보다 단점과 약점을 보는 눈이 우성이지 않을까. 나는 단점과 약점을 보는 눈도 있지만 그 기능은 상대적으로 절전상태로 유지해왔다. 일에서는 이 스위치가 반대로 작동하거나 균형을 맞춰주면 좋겠지만 그게 늘 잘되는 건 아니라서 사실 나는 때로 남에게 속아서 바보가 되지는 않을까 남몰래 걱정한다. 장점을 보는 눈의 그늘이다.


다시 예술로 돌아와서, 오늘은 오랜만에 재택근무하는 날이었고, 명연주 명음반을 청취할 수 있었다. 일이 바빠서 선곡표를 미리 확인하지 못했지만, 서두부터 집중감상곡에 대해 아저씨가 유난히 힘줘 말하는 느낌이 들어 정신없이 전화를 돌리는 와중에도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내 기분일 수도 있지만 이 엄청난 신보를 소개하는 아저씨 목소리에서도 흥분이 느껴졌다. 시대악기로 연주하는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였다. 연주자는 리나 투르 보네트. 대중적이지 않지만 명연주 명음반의 청취자라면 알아두시기 바란다는 아저씨의 인상적인 코멘트를 받은 주인공. 요즘 시대악기와 바이올린에 푹 빠진 내게 너무나 매력적인 연주였다. 힘과 에너지, 약간의 광기가 느껴지는 다이나믹하고 흥미로운 연주. 광풍 같았다. 시대악기는 소박하다는 일반적인 관념을 뛰어넘는다는 아저씨 말이 맞았다. 들으면서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처음 듣는 곡이라 멜로디도 기억나지도 않고 비교할 다른 연주도 모르지만 강렬한 첫 기억이다. 나는 새로운 곡과 연주자를 잊지 않기 위해 노트해놓고 주저없이 음반을 주문한다.


향유라는 단어의 뜻이 ‘자기것으로 소유하여 누림’이라고 되어 있어 놀랐다. 단순히 누리는 것이 아니라 소유의 의미가 있었다니. 지금껏 나는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했는데, 소유의 개념이 있다면 예술을 향유한다는 건 쉽게 쓸 수 있는 말이 못 된다. 작년에 APMA 에서 전시했던 아모레 퍼시픽의 개인소장 보물들(진짜 보물이다. 국보로 지정된 백자도 있고 수월관음도도 있는데 이들은 심지어 방대한 개인 콜렉션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을 봤는데, 그게 그들 집안에 걸려 있다면 그들은 그걸 향유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향유하고 있을까? 아니 할 수 있을까? 잠시 잠깐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들러 그림 앞을 스치는 한 순간 나는 그들을 향유한걸까? 허허실실할 줄 알았던 이 단어를 쓰는 데 장벽이 느껴지자 조금 슬퍼졌다. 소유라면 그다지 흥미도 재능도 없다.


소유에 재능이 없다는 말이 무색하게 오늘 음반 세 장을 주문했다. 크로이처 소나타와 함께 하프시코드로 연주하는 프랑스 모음곡을 주문했고, 입고 알림을 받은 카르미뇰라의 ‘사계’가 품절되기 전에 허겁지겁 주문하고 만세를 불렀다. 음반은 내게 소유를 허락한다. LP는 못해도 CD는 할 수 있다. 소유하여 누린다는 향유가 주는 기쁨을 갑자기 약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매일 듣지 않아도 물질로 소유하고 있어 어루만지고 매만질 수 있는 기쁨.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렴풋이 짐작해본다.


그나저나 향유가 아니면 무슨 단어로 내 감상의 기쁨과 즐거움을 표현할 수 있을까? 소유하지 않고도 누림이라 흠, 사전을 뒤적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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