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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Jun 27. 2021

#21 눈부신 바로크 바이올리니즘(2) : 바흐

줄리아노 카르미뇰라의 바흐 바이올린 협주곡

이야기는 다시 한번 인생, 단언하는 게 아니다, 에서 시작된다. 이번에는 카르미뇰라의 바흐 바이올린 협주곡(2014)이다. 하이라이트는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내게는 이미 최고가 있었고 나를 만족시킨 다른 연주는 지금껏 없었다. 연주가 시작되자 곧 눈이 번쩍 뜨였다. 기대가 없었으므로 충격은 배가 되었다.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BWV 1043


카르미뇰라의 두 대의 바이올린은 구조적 아름다움이 탁월한 연주다. 밀슈타인과 모리니(1962)처럼 심금을 울리는 드라마는 없다. 그와 비교하면 감정적으로 훨씬 담백하고 연주의 합은 더 완벽하다. 모든 연주자의 모든 소리는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정당하고 정확한 개별 악기 소리는 탄탄한 구조물을 구축한다. 구조물에는 튀어나오거나 비뚤어지거나 움푹 들어간 곳이 한 군데도 발견되지 않아 나를 놀라게 한다. 그 탄탄한 구조물은 투명하거나 반투명해서 귀를 기울이면 악기 하나하나의 소리를 분간해낼 수 있다. 유기적이면서도 자기 소리를 분명히 내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게 하는 연주. 어떤 사람들이 모여서 어떤 방법으로 연습하고 어떤 지휘를 받으면 이런 결과를 낼 수 있는 걸까? 상상도 안된다. 연주시간은 밀슈타인과 모리니보다 40초나 짧다. 카르미뇰라다운 속주랄까. ‘시계태엽 같은 합’이라는 표현은 카르미뇰라에게 내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모든 연주자의 박자 감각은 한 사람처럼 일관성 있어서 한음 한음의 시작과 끝, 음표의 무게는 정확하다. 끔찍할 정도로 정확하다. 끔찍하게 아름다워 극도의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정확성의 포로이므로 도리없이 매혹된다.


빠르고 정확하며 얼버무리지 않는 연주는 2악장에서도 계속된다. 카르미뇰라를 듣고 나니 밀슈타인과 모리니는 호흡이 대단히 길고 애틋할 정도로 낭만적인 듀엣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카르미뇰라의 연주에 서정적인 의도가 없다 해도 2악장 본연의 애틋함,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제거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보다. 바흐의 의도는 어떻게든 청자에게 닿는다. 카르미뇰라의 2악장에서 흥미로운 건 리듬이다. 마치 6/8박자나 3/4박자 셈여림처럼 느껴져서다. 12/8박자인데 강약약의 셈여림이 느껴져(특히 앞부분에서) 의아하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해석이다. 3악장을 언급하지 않는 건 말이 불필요할 정도로 흠잡을 데 없는 연주이기 때문이다.


최근 명연주 명음반에서는 카르미뇰라가 바이올린과 피콜로 첼로로 연주한 두 대의 바이올린(2020)을 소개한 적 있었는데, 나는 2014년 음반의 버전이 좋다. 이 곡에 있어서 만큼은 바이올린의 날카로움과 정확함에 익숙할 뿐 아니라 동의하기 때문이다. 첼로는 마음씨 좋은 소리를 내지만 바이올린처럼 즉각적이고 반응이 빠르지는 않다(좋은 첼로 연주자라면 큰 차이를 만들지는 않겠지만). 나를 열광케 하는 건 카르미뇰라 특유의 정확함이고 이 장점은 바이올린 두 대로써 극대화된다.


새로운 최고가 나타났다, 고는 못 하겠다. 지난 몇 주간 날 진지한 고민에 빠뜨리긴 했지만. 차라리 나는 바흐 두 대의 바이올린이라는 우주에 해와 달이 생겼다고 말하겠다. 나는 정확함의 노예이고 지나친 감상주의에 알러지를 일으키지만 밀슈타인과 모리니는 정확하고 아름답다. 그들의 2악장에 내가 이 정도로 각별한 애정을 가졌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처음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우주에 금성과 목성, 화성과 토성이 나타나리라는 기대감은 카르미뇰라 덕분에 더욱 부풀어 오른다.


바이올린 협주곡 G단조, BWV 1056R


나는 연습곡들과도 자주 사랑에 빠졌다. 내 사랑은 테크닉 교재나 쉽게 편곡된 명곡집에도 공평하게 작동한다. 스즈키 첼로 교본에는 바흐의 아리오소가 있는데, 그 곡은 나의 기도였다. 교본 부록 CD에 수록된 연주를 정말 좋아했다. 좋아했다기보다는 그 연주에 매달리고 의지했다는 편이 적확하다. 이 곡만큼은 어떤 유명 연주자의 버전도 내게 이런 느낌을 주지 않는다. 나는 이 노래를 나의 피에타 아니 그보다 키리에로 생각한다. 종교가 없는 나는 절박할 때 이 노래를 붙들고 기도했다. 미천하고 불완전한 이 인간을 불쌍히 여기고 어여삐 여겨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아직까지 그 역할을 대신할 노래는 찾지 못했다.


아리오소가 원래 하프시코드를 위해 작곡된 협주곡 BWV 1056의 2악장 라르고라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다. 바이올린을 위한 곡으로 바흐가 편곡하면서 카르미뇰라 음반에 실린 곡 번호 끝에 R이 붙었나 보다. 음반에는 익숙한 멜로디가 많았는데(당연히 모두 유명하기 때문이다) 아리오소가 들려서 놀랐다. 스즈키처럼 절절하지는 않지만 피치카토와 하프시코드가 바이올린의 노래를 가볍고 따스하게 받쳐준다. 새로운 연주가 싫지 않고 익숙한 노래를 새롭게 듣게 되어 반가웠다.


비발디와 바흐


맥락은 생각의 지형을 바꾸곤 한다. 역사라는 맥락이 사라진 이후의 오브제와 예술 감상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겠다.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그렇게까지 거창하고 거대한 건 아니다. 바흐에 편중(아니 매몰인가)되어 있던 내 세계에 비발디가 들어오자 두 작곡가의 차이가 드러났고 각각의 특징이 더 명확해졌다. 눈부시게 경쾌한 빛과 기쁨을 선사하는 비발디에 바흐가 이어지자, 바흐가 과묵하고(눈에 띄게 말수가 적다) 진지하며 무게감 있고 권위 있게 들렸다. 역사가 과연 (일직선상으로) 발전하는 것인지에 대해 여전히 논쟁을 하는지, 한다면 요즘 유행하는 이론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바흐는 확실히 위대하다. 비발디가 너무 재미있지만 바흐에서 더 높은 수준의 양식적인 완성도와 체계가 느껴졌다고 어떤 학술적인 논증도 없는 주장을 하고 싶어 진다. 주장의 진위를 따지고 싶은 모든 분들에게 비발디에 이어 바흐를 들어보는 경험을 추천한다.



음악

바흐,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BWV 1043, 1악장

Giuliano Carmignola(Violin), 2014 : 유튜브에서 듣기

Giuliano Carmignola(Violin), Mario Brunello(Violoncello Piccolo), 2020 : 유튜브에서 듣기


바흐, 바이올린 협주곡 G단조, BWV 1056R, 2악장(아리오소)

Giuliano Carmignola(Violin), 2014 : 유튜브에서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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