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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Jul 02. 2021

#22 바흐, 피아노와 하프시코드(1)

프랑스 모음곡, 머레이 페라이어와 블랑딘 라누

이 이야기를 위해서는 다시 바흐 건반에 대한 페라이어의 말로 돌아가야 한다. 20세기 중반까지도 피아니스트들에게 바흐 건반연주는 공공연한 금기였다는 인터뷰 말이다. 그 진의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아노로 바흐를 (멋지게)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궁금해진다. 대체 왜 피아니스트들은 바흐의 건반곡을 하프시코드를 위해 남겨두었던 걸까? 하프시코드로 연주되는 바흐와 피아노로 연주되는 바흐. 그 차이는 무엇일까?


네덜란드 바흐 소사이어티( 위대한 단체를 위한 별도의 지면을 마련할 것이다) 영상 ‘클라비어와 바흐에 관하여 따르면, 바흐에게 "클라비어" 모든 종류의 건반악기를 의미한다. 당시에는 하프시코드, 클라비코드, 포르테피아노 같은 다양한 클라비어가 존재했는데, 바흐가 “클라비어곡에 항상 악기를 특정한  아니다. 모든 클라비어가 같은 소리를 내기 때문은 아니었을  같다. 영상에서  건반악기를 소개할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아리아 한두 마디를 연주하는데,  짧은 소절만으로도 악기의 차이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현이 장치된 건반을 눌러 연주한다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클라비어는 매커니즘도 소리도 다르다. 그런데 바흐는 그저 "클라비어" 위해 작곡한 것이다. 그중 어떤 악기로 연주해도 상관없다는  말이다.  시점에서 다시 한번 타로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바흐는 청중에게 직접 닿는다. 누구(연주자) 무엇(악기) 통하든 전달되는, 음악이라는 형식을  초강력 메시지를 바흐는 창조해낸 것이다.


바흐의 위대한 커뮤니케이션에 공감한다면 차이를 살펴보는 건 한층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이다. 매체, 즉 악기의 차이, 그중에서도 클라비어 간의 차이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다시 한번 명연주 명음반이다. 얼마 전 선곡표에서 발견한 블랑딘 라누의 프랑스 모음곡 첫 트랙을 듣자마자 나는 재미의 섬광을 보았다.


프랑스 모음곡, 머레이 페라이어의 피아노 연주


프랑스 모음곡이라면 머레이 페라이어를 들었다(2016). 파르티타 전곡 녹음(2008, 2009) 후 나온 페라이어의 이 바흐 음반에 나는 완전히 빠져들었다(그 사이에 베토벤 녹음이 있다는 걸 몰라서 언급 않는 건 아니다). 손가락 부상으로 연주할 수 없던 기간 동안 바흐를 연구하며 많은 위안을 받았다던 페라이어의 인터뷰가 오래 잊히지 않는다. 그는 나만큼 바흐를 각별하게 여기는 것이 분명하다. 전곡은 순서대로 2개 CD에 담겨있다. 나는 장조인 4~6번이 있는 CD 2를 더 자주 들었다. 이미 고백한 것처럼 단조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단조는 내게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을 전한다. 이 두려움 때문에 나는 거의 모든 단조를 공평하게 회피한다. 1~3번이 모여있는 CD 1에는 슬픔이 담겨있다. 포근하고 사랑스러운 분홍색 커버를 배반하는 슬픔. 은은하지만 얕지만은 않은 슬픔.


슬프거나 말거나, 단조든 장조든 섬세하고 아름다운 페라이어 식의 바흐, 사랑스러운 바흐는 프랑스 모음곡에서 만개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페라이어의 말대로 파르티타나 영국 모음곡(이건 아직 안 들어봐서 내 의견은 아니다)과 구별되는 프랑스 모음곡의 개성인지도 모르겠다. 부드럽고 다정하며 섬세한 곡 자체의 특성 말이다. 프랑스 모음곡이 두 번째에 강세가 있는 프랑스식 음악 문법을 따른다는 해석도 재미있었다. 일반적으로 프랑스어 강세가 마지막 음절에 있다는 걸 떠올리면 음악과 말 사이의 관계를 유추하게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프랑스어라면 가장 아름답고 듣기 좋은 언어로 널리 사랑받고 있지 않은가. 이다지도 사랑스럽고 다정한 곡을 연주하는 데 페라이어는 스페셜리스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5번. 그중에서도 일곱 번째 곡인 지그다. 즐거움과 기쁨은 5번 전체를 관통하지만 마지막 곡인 지그의 기쁨은 특별하다. 페라이어 말대로 이건 pure joy, 순전한 기쁨이다. 첫 소절은 기쁨으로 날뛴다. 기쁨 외 다른 감정의 층이 없는 순수한 기쁨이다. 첫 곡인 알라망드가 평온한 기쁨으로 미소 짓게 하는 순간 내 마음은 이미 지그를 향해 달려 나가곤 한다.


프랑스 모음곡, 블랑딘 라누의 하프시코드 연주


블랑딘 라누 Blandine Rannou 의 하프시코드 음반(2001) 첫 트랙이 5번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첫눈에 사랑에 빠졌을까? 음, 그랬을 것이다. 역시 전곡이 담긴 앨범 전체가 훌륭하고 흥미로워 자주 찾는다. 그러니 결국 좋아하게 되었겠지만 곡 순서가 처음부터 더 강하게 나를 끌어당겼을 것이다. 라누의 앨범도 2 CD인데, 내가 편식하기 힘들도록 장조와 단조를 교묘하게 섞어두었다. 재생하면 바로 5번의 알라망드가 들리는 것도 반가운데, 페라이어와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좋은지! 반가움과 신선함이 동시에 귀를 사로잡았다.


라누를 들은 후 페라이어가 상대적으로 리드미컬하게 들린다. 라누의 템포는 페라이어보다 느리다. 페라이어적인 사랑스러움, 다정함보다는 평온함과 차분함이 돋보인다. 해석의 차이인 걸까? 아니면 하프시코드의 음 지속시간과 음량, 다이나믹이 피아노보다 작기 때문에 나타나는 악기의 차이인 걸까? 아마도 둘 다겠지. 라누의 하프시코드는 페라이어에 비해 감정적으로 더 잔잔하고 담백하며 조용하다. 페라이어의 바흐에 감정적 과잉이 없다고 생각했음에도 하프시코드에는 그 이상의 차분함이 깃든 것 같다. 존재 자체의 특성처럼. 그러면서도 글렌 굴드 같은 기하학적인 차가움은 없다. 담담하고 편안하지만 지루하지 않다. 차이는 5번의 첫 곡 알라망드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반면 5번의 마지막 곡 지그만큼은 페라이어 못지 않게 신나고 즐겁다. 이곡이 그렇게 연주되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는 듯이. 다시 한번 타로의 말이 대전제인지 모른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바흐는 연주자의 손을 조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흐를 피아노로 연주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피아노 연주만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른 종류의 "클라비어"로 연주하는 것은 같은 곡을 다른 악기로 연주하는 데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바흐는 자기 건반곡을 바이올린곡으로 편곡하기도 했는데, 그런 식으로 단지 Recompose가 필요 없는 다른 악기로 연주하는 것 말이다.


하프시코드로 프랑스 모음곡을 듣는 경험은 내게 바흐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관점과 지평을 열어주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건반악기가 피아노와 동일한 의미로 쓰인다는 점을 생각할 때 하프시코드로 듣는 바흐 건반은 더 의미 있는 경험이 되리라 확신한다. 위험한 말이지만, 하프시코드로 연주하는 바흐 건반곡이 때로 본질에 더 가까운 소리를 낸다고 느껴질 때에도 있다. 바흐 건반을 피아노로 연주하지 말라고 했던 위대한 피아니스트들의 조언이 조금은 이해된다고나 할까. 여기에 대한 좀 더 심각한 경우는 다음에서 계속된다.



음악

바흐 프랑스 모음곡 5번 중 알라망드

머레이 페라이어 연주 : 유튜브에서 듣기

블랑딘 라누 연주 : 유튜브에서 듣기

바흐 프랑스 모음곡 5번 중 지그

머레이 페라이어 연주 : 유튜브에서 듣기

블랑딘 라누 연주 : 유튜브에서 듣기


참고자료

Henstra and Van Doeselaar on Clavier and Bach, Netherlands Bach Society : 유튜브에서 보기

Murray Perahia - Bach - The French Suites (Trailer) : 유튜브에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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