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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Jul 03. 2021

#23 모범적인 낭만 : 슈베르트 즉흥곡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이 연주하는 슈베르트 즉흥곡 D.935, 3번

영화 '빌리 엘리어트(2001)'에서 주인공 빌리가 오디션을 위해 마침내 로얄 발레학교에 당도했을 때 흐르는 음악, 슈베르트의 즉흥곡 D.935 중 3번이다. 탄광촌, 광부 아버지와 형, 파업과 궁핍함. 빌리는 발레가 상징하는 세계로부터 사회계급적으로 너무나 멀리 있다. 발레를 원하는 소년은 발레계에서나 그가 속한 세계 양쪽에서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 된다. 이례적인 소수자가 겪어야 하는 시련을 이겨내고 마침내 바라던 세계의 문앞에 도착했을 때 빌리는 당황하고 주눅든다. 음악적으로 두 세계의 차이는 T.Rex와 슈베르트로 형상화 된다. 형의 LP로 T.Rex의 'Cosmic Dancer', 'Get It On', 'I Love to Boogie'를 듣고 춤추던 빌리는 슈베르트의 즉흥곡이 흐르는 발레학교의 모든 것에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정돈되고 고급스러운 학교 환경과 학생들의 모습에 매혹되는 대신 위화감을 느낀다.


정갈하고 모범적인 로열 발레학교에 딱 어울리는 이 음악은 뭘까? 모차르트인가? 그렇다기엔 너무 낭만적인데... 슈베르트는 가끔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데가 있다. 그의 어떤 노래들은 강력한 힘을 가진다. 특히 노래가 그렇다. 합창단에서 부른 '송어'도 그랬고(여성 합창으로 나는 알토였는데 정말 부르기 재밌는 곡이었다. 그 짧은 곡 안에서 스릴러에 가까운 긴장감이 조성되고 그 긴장이 해소된다. 가끔 합창이 그립다), 영화 '다가오는 것들'에서 이자벨 위페르의 눈물과 함께 흐르던 '물 위에서 노래함'도 그랬다. 그러고 보니 영화 '와니와 준하' O.S.T 중에서도 슈베르트의 왈츠를 좋아했다.


'빌리 엘리어트'에 쓰인 슈베르트의 네 개의 즉흥곡 D.935 중에서도 나는 3번을 편애한다. 변주곡인데, 주제 선율이 아름답다. 다른 수사나 설명이 필요 없이, 아름답다는 말 본연의 의미에 충실하게 아름답다. 알프레도 브란델이 널리 알려진 줄 알지만 나는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연주를 선호한다. 듣기에 거슬림이 없다. 적당히 투명한 느낌을 주는 것도 좋다. 청순하고 순진한 곡이다. 출근길 재생목록에서 이 음악이 시작되면 나도 모르게 아름답다, 거나 아 좋아, 라고 마음을 놓게 된다. 동시에 나라는 사람이 융통성이라고는 없는 영락 없는 모범생임을 시인하는 것 같은 마음에 어쩔 도리가 없구나, 라고 한숨을 쉰다. 참 답답한 사람이야, 했다가는 아니야, 나는 T.Rex도 좋아하잖아, 하고 스스로에 대한 작은 불만의 소리를 음악과 함께 흘려보낸다.


여름 장마가 시작되었다. 출근하지 않는 날 너무 소란스럽지 않게 비가 내리면 몸도 마음도 차분해져 좋다. 재생목록을 틀지 않았는데도 마음 속에서 지메르만이 연주하는 슈베르트 즉흥곡이 들려오는 저녁이다. 매복하고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잠재우기 위한 자기 보호 조치인걸까? 슈베르트가 아름다움과 평화만을 주는 여름밤이 되길 바라본다.



음악

슈베르트, 4개의 즉흥곡 D.935, 3번,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 유튜브에서 듣기

슈베르트, 물 위에서 노래함 D.774,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 유튜브에서 듣기

와니와 준하 OST,  Schubert Valses Nos. 7&27 : 유튜브에서 듣기

영화 '빌리 엘리엇', T.Rex, Cosmic Dancer 신 : 유튜브에서 보기

영화 '빌리 엘리엇', I Love to Boogie 댄스 신 : 유튜브에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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