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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Jul 04. 2021

#24 바흐, 피아노와 하프시코드(2)

인벤션 2번, 칸지 다이토의 하프시코드 연주

2018년 가을 20년 만에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나는 어린 시절 내 뇌가 어떻게 두 줄의 악보를 동시에 읽고 왼손과 오른손에 각각 올바른 지시를 내려 음표들을 치게 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엉망진창이었다는 뜻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주일에 세 번, 오후 6시가 되면 자정을 맞은 신데렐라처럼 회사를 박차고 나와 동네 피아노 학원으로 달려가 바흐 인벤션과 모차르트 소나타, 명곡집을 레슨 받았다. 이것이 당시 나의 동아줄이었다.


내 동아줄 중 하나였던 바흐 인벤션, 즉 2성은 왼손과 오른손이 동등하게 각자의 멜로디(반주와 주선율이 아니다)를 노래한다. 기억력과 기능 저하로 무거운 안개처럼 내려앉은 내 뇌는 이 흥미로운 악보 앞에서 혼란스러워 했다. 악보 아니라 어떤 것을 읽고 들어도 이해하거나 기억할 수 없는 때였다. 그런 상태를 받아들이고 병원에 가기까지는 아직 사계절과 또 한번의 봄이 필요했다. 그 와중에도 나는 뭔가 해보려고 고군분투했던 것 같다. 과연. 나의 생존본능은 욕망과 욕구인건가.


머레이 페라이어는 자신이 ‘감히’ 바흐 건반곡을 연주했다며 20세기 중반까지도 피아노로는 바흐를 연주하지 말라는 것이 불문율이었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는 사실인지도 모른다. 피아노로 바흐를 연주해선 안된다는 위대한 피아니스트들의 조언 말이다. 나는 인벤션 2번 때문에 그들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곡이 읽히지도 들리지도 않을 때 칸지 다이토의 하프시코드 연주 영상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하프시코드 연주가 완벽했기 때문에 나는 가까스로 이 곡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글렌 굴드가 피아노를 잘 쳐도 이 곡의 아이디어는 하프시코드로만 온전히 전달될 수 있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을 정도의 완벽함이었다(글렌 굴드도 진지하게 들어봤으니 하는 말이다).


매체/악기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열쇠라는 뜻이 아니다. 이 점을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 네덜란드 바흐 소사이어티에서는 어린이 연주자들이 하프시코드로 15개 인벤션 전곡을 연주하는 기획을 했던 것 같다. 열 명의 인벤션 연주를 보았는데, 가장 설득력 있었던 건 이 동양인 10세 연주자의 2번이었다. 다른 하프시코드 연주들은 내게 이 정도로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어떤 "클라비어(즉 건반악기)"인가가 연주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만큼, 아니 아마도 그 이상으로, 어떻게 해석하고 연주하느냐가 중요할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어떤 악기 앞에 앉은 연주자든 그 손은 바흐에게 조종당할지 모른다는 게 내 이야기의 대전제이지만.


그래서 칸지 다이토의 인벤션 연주가 어땠느냐 하면, 차분함의 극치이다. 연주를 지켜본 서양인을 인터뷰 했다면 바흐가 동양적인 zen의 가치를 만났다는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종류의 차분함이다. 이 어린이는 신동에게서 느낄 수 있는 전형적인 감동을 준다. 저 어린 나이에 모든 것을 알고 있구나.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이다. 글렌 굴드처럼 소란스럽지 않으면서도(그가 연주하는 음악이 아니라 그라는 존재가 시끄럽다는 뜻이다) 사람들의 귀와 눈을 집중시키는 퍼포먼스를 펼친다. 특히 여운을 남겨야 하는 음절이나 지연이 필요한 음을 잘 처리해서 곡 전체에 사색적인 분위기를 부여한다. 이 점이 따라하고 싶을 정도로 멋졌다. 아직 연하고 부드러운 손으로 만들어내는 적당한 무게를 가진 트릴도 좋다. 그리고 이 차분한 하프시코드 소리 속에서 나는 마침내 바흐의 두 손이 부르는 노래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프시코드의 음색은 흥미로운 데가 있다. 힘이나 화려함과는 다른 가치를 지니는 악기인 듯 하다. 조용하고 차분하며 딱히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소리를 낸다. 피아노는 피아노대로, 하프시코드는 하프시코드대로 자기의 의미를 만들 것이다. 지금 나를 건반악기의 세계로 이끄는 건 어쩌면 피아노보다는 하프시코드인지도 모르겠다.



음악

바흐, Invention 인벤션 2번, 칸지 다이토(하프시코드) : 유튜브에서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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