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땅에 살아가는 행운 : 가구야 공주 이야기

by 만정

심란한 나날이었다. 나의 업무솜씨에 고객님이 불만을 표하셨고(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내 업계에 대한 모욕을 내 앞에서 서슴없이 자행하셨다(이건 좀 충격적이었다). 내가 판단한 것보다 내상이 컸다. 십일년차 직장인도 화장실에서 울 수 있었다. 심란함은 주말 내내 내 얼굴에 스티커처럼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내 상태에 나 역시 당황했다.


컨디션이 안 좋을 때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최고의 처방은 잠을 잘 자고 밥을 잘 먹는 것이다. 여기서 회복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잠만 일찍 잘 자도 효과가 만점이다. 이번엔 이 방법으로도 해소가 안됐다. 그래서 오늘 휴가를 내기에 이른 것이다. 일이고 나발이고 나부터 살고 볼거다. 아니 효율을 위한 조치이다. 컨디션을 회복해야 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고 업무 효율이 증가한다. 이번 일로 타격을 입은 업무능력에 대한 스스로의 신뢰감을 다시 차곡차곡 쌓아나가려면 완전한 컨디션이 필요하다. 컨디션을 회복할 타이밍은 내가 결정해야 한다.


오전에 급한 업무를 처리하고 남자친구가 정성껏 준비해준 밥을 성의 없이 먹고(드문 일이다) 침대에 드러누웠다. 며칠 전 가입한 넷플릭스에서 에니메이션 ‘가구야 공주 이야기’를 찾는다. 오래 전 김혜리 기자님이 ‘이동진의 그럼에도 불구하고’에서 소개한 영화다. 러닝타임 2시간 17분. 내게는 너무 길지만 언제든 멈추면 그만이다.


그만인데, 그럴 수 없었다. 시작하자마자 완전히 빠져들었다. 대나무를 베어 생계를 잇는 할아범이 어느 날 대나무 속에서 엄지공주처럼 작은 여자아이를 발견하는 첫 시퀀스부터 아름답다. 그저, 영상이 아름답다. 수묵 담채화를 떠오르게 하는 화풍에 담긴 동양의 자연은 특히 영화 초반부에 집중되어 있다. 아름다운 자연이 초반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영화의 줄거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아이가 없는 노부부는 대나무가 준 이 아이를 귀한 분으로 모시는 한편 자식처럼 사랑으로 기른다. 아이는 대나무순처럼 빠르게 자란다. 시골 자연 속을 뛰고 구르며 행복한 유년기를 보낸다. 이 시절에 등장하는 동백과 피어나는 목련이 클로즈업 된 신의 아름다움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본 세번 째 아름다운 목련이다.


대나무 할아범은 그러나 귀하신 분의 ‘행복’을 위해 시골을 떠나 수도로 가기로 결심한다. 그 행복이란 속세 여성에 대한 대단히 남성적인 기준으로 정의된다. 귀한 집안에 시집 잘 가는 게 곧 여자에게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이다. 가구야 공주는 아버지가 설정한 행복을 달성하기 위해 제공된 삶 속에서 점차 불행해진다. 찬란하게 빛난다는 이름같은 외모와 고귀함은 오히려 그녀를 더 크고 깊은 불행으로 이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게도 고통이 전해져 눈물이 났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줄 아는 삶에 그런대로 적응하려는 고통 말이다. 가구야 공주의 고통은 곧 내 고통이었다.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을 가구야 공주의 삶에 대입해버리고 만 것이다. 자연 속에서 자연스러운 인간으로 살고 싶은 가구야 공주는 아버지가 설정한 행복에 가능한 소극적으로 저항하면서 점점 슬퍼지고 마침내 스스로 죽음을 청하기에 이른다. 영화에서는 달에서 온 가구야 공주가 이 땅에서의 불행을 견디다 못해 자신을 데려가달라고 달에게 요청한 것으로 나오지만 달로 돌아가는 것은 명백히 죽음의 은유다. 그러니까 인간은 잠시 이땅에서의 삶을 살다 죽음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영화의 중요한 세계관이다.


삶에 대한 영화의 관점은 대단히 절묘하다. 불행해진 가구야 공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 건(아마도 고통)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살아있다는 느낌만 있다면…

분명 행복해질 수 있었어.


자기가 원하는대로 존재하지 못할 때 살아있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어렴풋이 안다. 가구야 공주에게 행복은 자연과 자연스러운 삶이고 그것을 금지 당하자 슬퍼진 것이다. 불행해진 것이다. 스스로 죽음을 요청할 정도로. 그런데 막상 본인이 달로 돌아가게 된다는 사실과 그 날짜를 알게 되자, 다시 말해 자신이 죽을 날을 아는 시한부가 되자 그녀는 더 큰 고뇌에 빠진다.


기쁨도 슬픔도

이땅에 존재하는 건 모두 생기가 넘쳐!


그녀는 불행하더라도 이땅에 존재하고 싶어 괴로워한다. 살고 싶어한다. 다시 한번 너무나 살고 싶어진다. 죽음의 사절단이 기쁘고 즐거운 풍악을 울리며 도착한다는 것은 묘한 일이다. 이땅에서의 괴로움을(물론 행복도) 잊고 달의 세계로 돌아가는 일이 축복할 일이라는 듯한 등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평온한 세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세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가구야 공주는 삶에 대한 찬사를 마지막 순간까지 표한다. 그래도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삶에 대한 애착과 의지에 대한 이 기묘한 이야기를 보고 나서 한참동안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한번 뿐인 이땅에서의 삶에서 내 행복을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내 의무라는 깨달음이 나를 후려쳤다. 가구야 공주가 아버지 뜻에 소극적으로 저항하는 대신 자기가 행복한 환경을 찾아 집을 떠났다면 어땠을까? 그랬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나도 알만 한 나이다. 그래도 어쩐지 행복해져야 할 의무를 방기하는 데 대한 경종 소리를 듣는 것만 같았다. 한번 뿐인 생이니까. 시간은 유한하니까. 내가 지금 여기서 이렇게 있는 게 내 최선은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살고 싶다. 이땅에서 오래도록 뒹굴고 싶다. 내 인생의 기쁨과 슬픔의 조합의 농도는 어떻게 맞춰야 하는 걸까? 최선을 찾아야 하는 걸까? 최적을 찾아야 하는 걸까? 최적의 조합을 찾았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많은 눈물이 필요하다면 좋은 선택인걸까? 내가 생각하는 최선을 추구하는 데에는 사람들이 말리는 어려움이 불보듯 뻔한데 그렇다면 그게 최선이라고 할 수는 있나? 좋은 답은 어디에 있는 걸까? 이렇게 어렵고 무거운 질문을 던진 그녀, 가구야 공주가 당분간 내 곁을 가까이서 맴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