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괜찮은 사람들 : 디센던트

by 만정

가끔 영화 '디센던트(2012)' 생각을 한다. 서너 번쯤 봤다(어쩌면 대여섯 번). 성시경의 'FM 음악도시'에서 김혜리 기자가 이 영화를 다룬 편은 백번쯤 들었다(어쩌면 이삼백 번?). 덕분에 추운 겨울 맨손으로 병맥주를 들고 마신다는 독일인 에피소드(성시경이 막 독일에 다녀온 참이었다)와 이 영화 내내 흘러나오는 나긋한 하와이안 음악은 내 뇌에서 기묘한 결합(화학적인 걸까? 물리적인 걸까? 신경적이라는 건 말이 될까?)을 이루고 있다.


나는 반복을 사랑한다. 반복은 어떤 의미에서 반복을 넘어선다. 반복할 때마다 새로운 점을 찾게 되기 때문이다.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영화를 다시 볼 때마다 줄거리나 자막에 집중하느라 놓쳤던 디테일과 세공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영화가 말하고 보여주려고 했던 것과 영화 속 인물들을 나는 더 많이 더 깊이 알아간다. 이해를 기반으로 우리는 점차 친밀하고 특별한 사이가 된다. 반복의 결과는 대개 관계의 진전이고, 제자리인 경우는 흔치 않으며, 퇴보인 경우는 단언컨대 없다(최소한 나와 영화의 경우에는).


영화가 시작한 지 오래지 않아, 주인공 맷 킹은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아내가 영영 깨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는다. 하와이 왕족 혈통이지만 변호사 수입으로만 생계를 유지한다는 자기 원칙에 따라 열심히 일하고 가정에 다소 소홀했던 이 아저씨는 갑작스레 아내를 보내야만 한다. 이 '과정'이 영화의 한 줄기를 이룬다. 한편 이 와중에 가문에서 신탁 관리 중인 하와이 미개발지 매각에 대한 최종 결정 역시 맷의 몫이다. 결정의 날은 맷이 처한 개인적 상황을 봐주지 않고 다가온다. 과연 맷은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이것이 영화의 다른 줄기다.


'디센던트'는 내게 매우 독특한 케이스이다. 여러 번 봐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데도 다시 보고 싶어지는 영화였다. 그러므로, 첫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이 영화가 분명 좋은 것 같은데, 좋은 이유가 뭘까? 두 번째 질문은 내용과 더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이다: 맷은 왜 신탁 관리 중인 땅을 매각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걸까(이런, 스포일러인가)? 이 두 가지 의문에 답하기 위한 목적으로 오늘 영화를 다시 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비로소 이 영화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그 사랑은 진정한 이해에 따른 것이(라고 믿고 싶)다.


시드 : (맷을 비난하는 외할아버지를 향해) 맙소사! 그만 좀 하세요.

알렉스 : 이런 상황에서도 아빠는 훌륭하게 대처했어요!


딸이 곧 죽게 되자 외할아버지의 슬픔은 부적절하게도 사위인 맷을 향한 비난으로 화한다. 그러자 큰딸 알렉스와 그 친구 시드는 위와 같이 말하며 맷을 보호하고 옹호한다. 알렉스의 대사는 내가 이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그는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사실 최악이라고 생각한다) 훌륭한 선택들을 해냈다.


맷이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에만 매진하는 바람에 가정에 소홀한 남편이자 아버지였음은 거의 분명하다. 죽기 전 아내가 바람을 피우고 이혼 결심도 했다는 것으로 보아(앗, 스포일러인가), 어지간히 소홀한 정도를 넘어섰는지도 모르겠다. 딸들의 근황에 대해 아는 바도 적다. 갈등조차 없을 정도로 서로를 모르고 지낸 지 오래임이 영화 곳곳에서 드러난다.


맷의 비범함은 이 모든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그가 선택한 행동과 말에서 드러난다. '바람피운' '아내를 곧 잃는다'는 복합적인 어려움에 직면한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부모님을 '찾아가' 비보를 전한다(알렉스는 전화를 하라고 했다. 나도 동의했다). 일방적으로 아내만 두둔하는 장인어른의 울화통 터지는 말도 묵묵히 듣고 참는다(나라면 대꾸 않고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말이었다). 아내의 지인들에게 곧 그녀가 세상을 떠날 것이며, 그전에 병원을 찾아 그녀를 만나도록 알리기 위해 이 와중에 집에 사람들을 초대하는 행사를 치르기도 한다(나라면 아내를 잃는다는 '내' 슬픔에 매몰되어 얼어붙어버렸을 텐데, 아내를 위해 이걸 해내다니, 너무 훌륭한 것 아닌가. 게다가 배우자가 바람 피운 것을 며칠 전 알았다면 아무리 그가 곧 죽는대도 이런 행사를 계획할 수 있었을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심지어 불륜남을 '찾아' 가 아내와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도록 소식을 전한다. 이유는 단지 아내가 사랑했던 남자와도 마지막 인사를 원할 거라는 것 뿐이다(이 아저씨, 이 정도면 쎄인트 아닌가!).


그도 화를 낸다. 불륜남을 알아내기 위해 찾아간 친구에게 심한 말을 한다. 아이들을 내보낸 병실에서,의식불명의 아내를 향해 원망의 말을 퍼붓고 그녀의 곰인형을 집어던지는 폭력적인 행동을 한다(그러나 아이들에게는 이런 사정을 내색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올바르고 사려깊은 사람이다. 다음 장면에서는 엄마에게 화를 내는 열일곱 큰 딸 엉덩이를 때리며 엄마에게 잘하라고 훈육한다). 그래봐야 가만 침대에 누워 아마도 듣지 못할 것이므로 맷의 일방적 외침이 코믹하게 느껴지기만 한다. 불륜남에게 던지는 몇 가지 질문과 비난의 표정은 비현실적으로 신사적이라 영화에 희극적 요소를 더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가 표현하는 분노는 지나쳐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심하게 대한 사람조차 결코 지나치게 심하게 대하지 않는다. 그 와중에도 선을 지킨다는 데 나는 탄복하고 말았다(음, 다른 인물들이 여러 차례 감정도 없는 사람이냐고 비난하긴 했다. 무척 이성적인 사람이라는 뜻이라면 동의한다. 단점과 장점은 자주 동일한 특질에 대한 양면적 가치평가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렇게 대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내가 그 예다).


맷이 감정과 상황에 짓눌리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냈다는 것을, 사람으로 할 도리를 다했다는 것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결코 쉬운 일도 평범한 일도 아니다. 누구나 그가 한 행동이 옳다고 말할 수 있지만 누구나 그 상황에서 맷처럼 할 수 없다는 걸 나는 안다(다시 한번, 내가 그 예다). 그는 알렉스의 옹호에 걸맞은 좋은 사람이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맷은, 나를, 내 마음을 움직였다.


시드 : 미안하대요? 미안해야 할 텐데. 그 사람 아내한텐 말 안 했잖아요. 나라면 다 말했을 텐데.... 그 사람 아내도 알아야죠. 안 그러면 평생 멍청한 여자가 되잖아요.

맷 : 그렇게 심하게 할 거 없어. 이젠 상관없어. 다 지난 일이야.


'좋은 사람'에 대한 문제는 마침 요즘 나를 괴롭히고 있다. 나는 회사에서 내가 부당한 대우를 받은 데 대한 충격에서 몇 주 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의사 선생님은 내게 그가 나를 무시했다는 사실과(아마도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을 거라고 덧붙이셨다. 수십 년 동안 그렇게 살아왔을 것이므로) 그 행동으로 내가 위축되었다는 사실을 말로써 그에게 전해 볼 것을 권했다. 다만 그 말은 '말'이었다. 공격이나 비난이 아닌 말 말이다. 화를 외부로 표출하는 "쌈닭"이 되지 않으면서(지난 반년 정도 이 시기를 거쳤다. 물론 그런 내가 싫었다. 그건 명백히 '좋은 사람'이 아니니까) 동시에 표출되지 못한 화가 나 자신을 향함으로써 나를 무능한 인간으로 무기력하게 만드는 (자해) 행위도 그만두어야 했다(이건 스스로에게 '좋은 사람'이 못 된다). 화를 말로 적절히 표현하거나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 상대를 무시하는 방법을 나는 이제 새롭게 배우고 연습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무시당할 때 되갚아주거나 표현하지 않으면 내가 바보가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동시에 되갚는 내 모습이 나쁜 사람이 되는 데 대해서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그 사이에서 적절한 지점을 찾는 건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그런 크지만 작은 투쟁을 매일 하는 건 생각만 해도 지치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까지 "심하게 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닐까? 좀 바보 같아도 심하게 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내 품위와 위엄을 지킬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럼으로써 나는 바보가 아니라 인간다운 인간으로서 나를 지킬 수 있는 게 아닐까? 맷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아가 그가 잘못한 건 잘못한 거고 내가 할 도리는 해야 한다는 식의 건전하고 건강한 사고방식을 간절히 되찾고 싶어졌다.


넓게 보면 맷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완벽하지 않지만 어떤 면에서 누구나 좋은 사람들이다. 불륜남은 시드의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 자기 아내에게 불륜 사실을 고백해 그녀를 멍청한 여자로 남겨두는 나쁜 짓까지는 하지 않았다(물론 불륜이 이미 나쁜 짓이지만). 외할아버지는 치매로 보이는 아내를 정성으로 돌본다. 성시경 표현에 따르면 "매끄럽지 않은 딸들", 즉 입과 행동이 다소 거친 맷의 두 딸은 거칠게 말할지언정 대화나 상황을 피하지 않는 정도의 괜찮은 친구들이다. 맷의 훌륭한 점 중에는 십 대 딸들에게든 멍청해 보이는 그 친구에게든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솔직히 털어놓고 그들의 조언과 도움을 구한다는 것인데, 그의 카운트 파트너들 역시 거칠고 울화통 치미는 답일지언정 상황에 진심으로 임하는 정도의 '보통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맷 : 누구한테도 팔기 싫어. 갖고 있을래. ... 이렇게 하면 다들 안심할 거야. 하와이 전체가 말이야. ... 여기(매매 계약서에) 사인하면 우리가 지켜야 할 게 영원히 사라져.


처음에는 맷이 신탁지를 팔지 않기로 한 결정이 아내 불륜남에 대한 복수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랬다면 다른 매수자를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므로 그건 맞지 않았다. 결국 맷은 맷 다운 좋은 결정을 내린 것 같다. 아내를 잃는 상황에서도 맷 답게 성실하고 열심히 생각한 끝에, 하와이 전체를 위한 올바른 결정을 내린 것이다. 가문의 재산이 아닌 자기가 번 돈으로 산다는 맷의 철칙과도 일관성 있는 결정이다. 매각을 원하는 다른 사촌들은 이전과 동세대의 다른 가족들처럼 어쩌다 가문에 남겨진 땅을 팔아 쉽게 부를 얻고 또 쉽게 파산하지만 맷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까, 아내의 일에서건 신탁지 매각의 일에서건, (그리고 아마 인생의 다른 일들에서도 마찬가지일 텐데) 맷은 대체로 (관심만 갖는다면) 바람직하고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나를 이 영화로 반복해서 끌어들이고 있었다. 나는 이 사람의 방식에 감동받았고, 그 방식을 존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 실체를 알게 된 지금, 나는 인생이 던지는 시련과 어려움과 고통에도 (늦더라도) 바른 결정을 내리는 이 사람을 따르고 싶어 진다.


돌이켜보면, 이 영화가 가까운 사람의 상실이라는 묵직한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혜리 기자의 분류처럼 '코미디' 장르로 인식될 수 있었던 데에는 하와이 특유의 자연, 맷의 "우스꽝스러운(맷의 표현을 다만 인용한 것뿐이다)" 하와이식 옷차림, 훌라 춤을 춰야 할 것 같은 하와이 음악만 작용한 건 아니다. 이 힘든 상황에 훌륭하게 대처해내는 맷이라는 인물이 주는 안도감과 안정감이 오히려 그 핵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까지 영화의 전모를 파악하고 나자(감히!) 모두에게 일요일 오후의 영화로 강력히 권하고 싶어진다. 일요일 오후는 우리 모두 좋은 사람(그리고 좋은 사람으로서의 우리 자신)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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