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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Jul 10. 2021

#26 뜨거운 시원함 : 나의 첫 크로이처 소나타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 리나 투르 보네트(2020)

감자 말이 맞았다. 내가 아름다워야 글도 아름다울 수 있다. 못 알아듣는 내게 감자는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외모가 아름다워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스스로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야 한다고. 나는 맞장구를 쳤다. 글은 나를 드러낸다. 글이 아름답고 명료하길 바란다면(내 바람이다) 나라는 인간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내가 쓰는 글의 주어는 오직 나이기 때문에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내 느낌, 내 생각, 내 취향. 이 기획에서 나를 숨기기는 불가능하다. 꿈에서도 우회와 당의정을 모르는 나는 그래서 소설을 쓰지 못한다. 5월 마지막 날. 나는 아름다웠고 나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충만했다. 그 아름다움과 확신은 언제까지고 느긋하게 계속될 것 같았다.

 

나의 아름다움은 항상 거기 있지만 변화무쌍하고 통제 불가능한 세계의 개입에 의해 종종 가려지거나 희미해진다. 아름답지 않아도 글은 쓸 수 있지만 그 글은 아름답지 않은 나를 반영하고야 만다. 혼란과 불안에 잠식당한 시기에 쓴 글에서 나는 혼란과 불안을 읽는다.


글이 드러내는 건 내 상태만이 아니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고정관념과 드러날 계기가 없었을 뿐인 내적 모순, 비합리적 믿음과 무지는 활자라는 실체를 입고 외화 된다. 마침내 객관화된 내 비합리성과 무지를 나는 마주(해야) 한다. 글렌 굴드에 대한 못마땅함은 한 가지 예에 지나지 않는다. 부끄러운 것부터 치명적인 것까지 당연시 해온 전제들이 밝혀지는 순간 감정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사랑하는 것을 말하는 자리에 사랑하지 않는 것들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고 교묘하게 섞여 든다. 베토벤에 대한 심드렁함을 마침내 활자로 정식화하려 하자 나는 당황스러워졌다.


베토벤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다만 사람들의 칭송에 완전히 공감하지 못했다. 베토벤의 업적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의 교향곡과 협주곡들, 특히 피아노 곡들의 음악사적 의의를 (머리로는) 알고 있다. 또한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와 교향곡 7번을 즐겨 듣는다. 9번 합창에는 비엔나에서의 추억이 깃들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감동받아본 적이 없었다니. 이런 안타까운 경우가 있나.


그런 베토벤을 향한 입구를 뜻밖의 곳에서 발견한 듯 싶다. 명연주 명음반을 통해 소개받은 리나 투르 보네트의 신보(2020)가 입구를 찾는 횃불이 되어 주었다.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단 한 번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연주다. 연주 경력에 비해 대중적인 인지도는 낮지만 주목할만한 연주자라고 정만섭 아저씨는 소개했다. 시대악기 답지 않은 힘 있는 연주라고, 마이너 레이블 특유의 질감이 살아있는 녹음이라 레코딩으로서의 의의도 있다셨다. 나는 더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듣고 또 듣고 또다시 들어봤지만, 결국 다음의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아저씨의 모든 코멘트에 동의한다. 처음 들었던 그 순간처럼.


내게 이 녹음의 가장 특별한 점은 연주에 깃든 조소 혹은 시니컬함이다. 이 연주에서는 어쩐지 그런 비뚤어진 감정이 보인다. 조소와 시니컬함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삶의 태도다. 나는 시니컬함이 불성실함과 미성숙함의 발현이며 냉소와 조소는 겁쟁이들의 표현법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이 비난에는 '직면'을 선호하는 내 가치판단이 개입할 것이다. 나는 냉소라는 ‘우회’가 그다지 우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냉소와 조소의 차가움에 몸서리친다. 그런데 연주에 담긴 조소에 반해버렸다. 그 조소는 신랄하다. 심지어 거기에는 광기가 서려있다. 1악장의 뒤틀린 마음은 시원하지만 뜨겁다. 내게 클라이막스는 1악장 3분 58초 구간이다. 그 시원함이란! 찌르는 듯한 E 음이 안정장치 없이 폭주하는 순간의 쾌감은 한 번도 스쳐간 적이 없다. 이 부분은 책을 읽거나 글을 쓰던 나를 다시 음악으로 끌어들이고 만다. 나는 아, 대단하다, 하며 음악이 흘러나오는 스피커를 올려다본다. 그리곤 그래, 역시 3분 58초야, 하고 경의를 표한다.


대단한 건 1악장만이 아니다. 느린 2악장도 좋지만 내가 아는 모든 마지막 3악장 중 가장 유의미한 3악장이 여기 있다. 아무리 좋은 소나타나 협주곡에서도 피날레 3악장은 끝내기 위한 사족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음미가 끝났으면 이제 먹어 치워 버리자는 생각으로 3악장을 쓴 걸까 싶을 때도 있다. 그런데 이 프레스토는 마지막까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폭주의 긴장감은 40여 분의 연주 시간 동안 유지된다. 단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치는 법이 없는데 오히려 감정적인 해방감이 든다는 건 신비로운 경험이다. 이 곡이 묘사하는 주된 감정과 긴장감은 모두 내게 부정적으로 낙인 찍힌 것들인데, 그 두 가지를 전면에 내세운 이 연주는 폭주의 쾌감과 시원한 해방감을 선사하는 것이다. 그 의외성이 주는 놀라움이 좋다. 내적인 모순을 일으키는 간극이 재미있다. 나는 이 곡이 액션 블록버스터처럼 좋다.


생각할수록 희한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런 블록버스터가 소나타라니. 물론 소나타는 노래인 칸타타와 대비해 기악곡을 의미하지만, 규모 면에서는 악기 한 두 개가 함께 하는 아기자기한 형식으로 나는 알고 있다. 이렇게 길고 스케일 큰 음악이 한 대의 바이올린과 한 대의 포르테피아노만으로 연주되었다니! 믿을 수 없다. 베토벤은 확실히 양식의 확장과 발전을 이룬 것 같다. 소나타를 이렇게까지 거대하게 만들다니. 리나 투르 보네트의 바이올린과 아우렐리아 비소반의 포르테피아노는 베토벤의 위업을 멋지게 실현해낸다. 이것이 내 첫 크로이처 소나타이므로 이제 다른 연주들이 궁금해진다. 크로이처 소나타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 사이 어디 쯤에 이 녹음이 위치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진다. 동시에 알고 싶지 않기도 하다. 지금은 이 연주를 평가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다. 온전히 빠져들어 흥건히 젖어버리고 싶다. 완전히 흡수해버리고 싶다.


그나저나 베토벤 씨, 첼로 소나타와 너무 비교되는 작품을 만드신 거 아닙니까? 저는 그 작품 때문에 당신의 소나타와 협주곡들을 어중간한 고전주의 흉내로 지루하게 생각하곤 했단 말입니다. 그간의 제 오해를 어떻게 보상하시겠습니까? 라고 적반하장으로 따지고 싶은 마음조차 잊게 하는 이 바이올린 소나타에는 지루함이 없다. 그것으로 족하다. 정말이지 신난다.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재미주의자에게 이 이상의 기쁨과 찬사가 있을까.


내가 발견한 베토벤의 입구는 바이올린을 위시한 현악기 군으로 구성된 현악 4중주로 이어질 것 같다. 특히 후기 작품들을 먼저 들어볼 생각이다. 아직 낭만주의의 넘치는 감정이 도래하기 전의 구조적인 아름다움을 기대하고 있다. 이 바이올린 소나타는 왠지 베토벤 후기 실내악에 이런 기대를 품게 했다. 다음 여정에 재미주의자의 마음이 설레어 온다.



음악

Beethoven, Violin Sonata No. 9 in A Major, Op. 47, "Kreutzer": I. Adagio sostenuto - Presto, Lina Tur Bonet (Violin) : 유튜브에서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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