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만정 Jul 15. 2021

#27 모차르트의 그림자 : 단조들(2)

리히터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나타 8번 1악장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그의 피아노를 듣고 있자면 이 세상은 존재하기에 너무 더럽고 나쁘고 하찮아서 그를 슬프게 만드는 것만 같다. 리히터는 이런 슬픔에 대항해보려고 눈을 감고 자기가 기억하는 전생(어쩌면 후생)의 순수함과 고결함을 명주실처럼 뽑아낸 것 같은 피아노 소리를 낸다. 이 세상에 없는 순수함과 고결함을 진주처럼 또로로로 굴려내는 것 같은 소리 말이다. 이상한 체념과 슬픔이 배어 있는 섬세한 아름다움이 나를 소스라치게 한다. 그런 사람들은 슬퍼지곤 하는데. 리히터가 슬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사진은 어딘지 비밀스럽고 쓸쓸해 보인다. 사진과 소리에서 느껴지는 거리감, 현실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있는 듯한 거리감이 그를 신비롭게 만든다.


리히터에 대한 위의 소회는 모차르트와 바흐 한정이다. 레파토리가 방대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다른 곡 해석이나 연주 스타일을 아직 알지 못해서 붙이는 강박적 단서다. 슬프게도 바흐 평균율은 리히터가 연주하는 1번만 듣는다. 좋다는 다른 연주자들도, 리히터가 연주한 같은 앨범의 나머지 곡들도 나를 움직인 적이 없었다. 아직까지는. 1번은 리히터만이 나를 설득한다. 내가 악보를 소리로 옮겨낼 때를 제외하면. 그 순간은 바흐와 내가 직접 마주하기 때문에 특별함이 생겨난다. 특별함은 내게도 있지만 완전함은 리히터에게만 있다. 투명하고 순수한 연주다. 그러나 절대 깨지지는 않을 것이다. 유리처럼 산산이 깨지기보다는 차라리 눈 결정처럼 녹아 사라질 것이다.


오늘은 유독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8번 A 단조 1악장이 생각나는 날이었다. 내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이 곡은 리히터의 89년 런던 실황이다.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8개 중 단조는 단 두 개인데, 8번이 그 하나다. 8번 1악장은 모차르트 답지 않게 정색한 얼굴이다. 평소와 달리 굳은 표정에 어금니를 깨문 듯 하다. 말수도 적다(다른 작곡가들에 비하면 그래도 여전히 많은 편이다). 쾌활하고 사랑스러운 얼굴은 나를 외면하고 있다. 첫마디 오른손의 E음이 네 번 이어지는 동안 왼손은 화음을 꽉 채운 8분 음표로 다급함과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생각해보니 불안정함과 긴장감을 일으키는 건 바쁘게 움직이는 왼손이었던 것 같다. 피아노 협주곡 23번 2악장이 무기력했다면 피아노 소나타 8번 1악장은 격렬하다. 앞머리의 악센트 때문에 곧 풍랑이 일 것 같은 비장함이 조성된다. 첫마디는 풍랑에 대한 일기예보다. 마침내 리히터의 8번 1악장을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저 멋짐(좀 뻔해서 기운이 빠지지만 솔직한 심경이다).


피아노 학원에서 8번을 마주했을 때 솔직히 겁을 먹었다. 모차르트 단조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 두려움은 피아노 협주곡 23번 2악장에 기인한다. 하지만 단조에도 저마다의 사연과 결이 있다. 무기력하고 처참한 단조, 격정적인 단조, 시원한 단조 등등. 나는 8번을 연습하는 동안 이 당연한 사실을 일부 깨달았다. 당연한 말인데, 모든 단조가 같은 정조를 전달할 리 없지 않은가. 8번 1악장은 멋졌다. 적어도 리히터의 연주로 듣는 8번은.


엄밀히 말해, 1악장의 감정이 단일한 것은 아니다. 첫 주제가 단조로 곧 닥쳐올 풍랑을 예시한다면 장조 전환이 일어나는 두 번째 주제에서는 모차르트 특유의 사랑스러움이 되살아난다. 여전히 아주 안심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웃는 듯 우는 것 같지만, 말 많고 사랑스러운 특유의 모차르트가 불안한 모습으로 서성인다. 1주제의 강렬함과 2주제의 귀여움에는 이질감이 없다. 물론 그런 장조에서 다시 단조로 얼굴을 바꾸는 흐름을 모차르트는 아주 잘 구사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때의 전환은 이례적으로 강렬하다. 단조로 돌아서는 순간 파도가 바위에 거세게 부딪히는 듯한 충격을 리히터는 손가락에 온 체중을 실은 소리로 재현한다. 내가 좋아하는 부분이다.


89년 실황 영상에서 리히터는 오페라 오케스트라석처럼 어두운 곳에서 악보 앞에 최소한처럼 보이는 노란 조명만을 켜고 연주한다. 말년에 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그런 콘서트 환경을 요구했다고 들었다. 시각은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는 감각기관이다. 소리에 집중하려면 시각은 절전으로 돌리는 게 현명하다. 리히터도 그런 생각을 한 걸까?


하루에도 크고 작은 풍랑이 마음 속 바다에 수십 번 이는 요즘이다. 괜찮은 걸지도 몰라와 이게 뭔가 사이를 오가는 내 마음의 선곡이었다. 내 마음의 풍랑이 리히터처럼 완전하고 아름답고 고귀하지 못한 건 아쉽다. 아쉬움은 글 쓰는 내내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리히터가 달래주었다. 꿈나라에서는 태풍에 넘실대는 무서운 파도가 부서지는 해안 절벽을 바라보며 제주 서귀포 칼 호텔의 객실에 있고 싶다. 있어본 적 없는 그곳에서 본 적 없는 태풍을 안전하고 감상적으로 바라보고 싶다. 한 발짝 떨어져서.



음악

Mozart, Piano Sonata No.8 in A minor, K310, 1악장, Sviatoslav Richter (1989) : 유튜브에서 듣기



매거진의 이전글 #26 뜨거운 시원함 : 나의 첫 크로이처 소나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