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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Aug 10. 2021

#30 앙상블 : 함께 할 수 있다면

책 ‘음악의 언어’와 영화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누구와 함께인지가 가장 중요하네요.”


지금의 의사 선생님을 만나기 전 5개월은 회사 상담 프로그램을 이용했다. 상담 선생님은 내 인생 그래프에 위와 같은 해석을 내놓았다. 나이를 가로축으로 두고 세로축 위로는 웃는 얼굴, 아래로는 우는 얼굴이 그려진 종이에 그간의 좋은 일과 나쁜 일을 적었다. 엄마, 이모와 함께 했던 로마 여행이 좋음의 극에, 대학원에서 경험한 기묘한 사건이 나쁨의 극에 있었을 것이다. 그 사이에 남자친구를 만난 폭발적인 기쁨과 실패한 회사생활이 출렁였겠지. 중학교 때 오케스트라 활동과 대학 때 합창단 활동은 적잖은 강도의 좋음 좌표를 찍었을 것이고 유치원에서 엄마가 보고 싶어 매일 징징대다 비오는 날 먼지나게 엉덩이를 맞았던 일은 경미한 나쁨으로 기억해냈으리라.


그런데 “함께”라니. 나는 어리둥절했다. 타인에 무관심하고 가능한 한 다른 존재와의 접촉 면적을 줄이길 희망하는 나란 인간에게? 함께 하는 “사람”이? 이유는 안 물었던 건지 듣고도 잊은 건지 모르겠다.


Ensemble, C’est Tout.


이 달콤한 불어를 몇 번 소리내어 읽는다. (적어도) 올해 내게 가장 중요한 문장이 된 영화 제목. 한국어 제목 ‘함께 있을 수 있다면’도 나쁘지 않지만 내멋대로 직역해 ‘함께, 그거면 돼’, 라거나 ‘함께, 그게 전부야’로 생각하곤 한다. 가장 달콤하고 짜릿한 건 불어 그대로 쓰고 읽고 되뇌일 때지만.


가난하지만 아름답고 고귀한 기운을 숨길 수 없는 화가 까미유와 이웃집 귀족청년 필리베르 사이에 우정이 싹튼다. 필리베르는 인생에 적잖은 방해꾼이었을 법한 말더듬이 습관과 상관 없이 예의 바르고 심성이 고운데, 독감에 걸린 까미유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 돌봐주고 함께 살기로 해 그녀를 열악한 환경에서 구출한다. 카미유보다 먼저 필리베르가 집에 들인 친구 프랑크는 요리사로 성실하게 일하지만 노동 강도는 그를 피곤에 절여 본래의 선함을 자주 가린다. 필리베르가 딱히 원하는 게 있어서 이들을 집에 들인 건 아닌다. 바라는 바 없이 베풀 수 있는 사치는 귀족의 특권이겠지. 세 사람이 세트를 이룬 순간 나는 영화에 푹 빠졌고 네 번째 멤버가 합류했을 때 나는 이 영화를 사랑하게 된다, 아마도 영원히.


귀족의 의무인 듯 착한 마음씨 때문인 듯(아마 둘의 결합일텐데) 필리베르를 중심으로 구성된 이 세트는 내게 우정과 사랑 이상으로 느껴진다. 우정이든 남녀 간의 사랑이든 결합제 원료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마음처럼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필리베르가 돈이 부족한 이들을 거든다. 그렇게 함께 하게 된 이들은 돈이 아닌 방식으로 다른 이의 짐을 덜어준다. 서로의 짐을 나눠진 이들의 삶은 객관적으로 나아져 마침내 본연의 선함과 고귀함을 한층 선명하게 세상에 드러낸다. 그렇게 그들은 모두 행복해진다, 함께. 그러니 함께 할 수 있다면 그게 전부이지만, 함께 한다는 것, 그것이 전부이기도 하다. 이들이 둘이나 셋이 아닌 넷이어서 나는 더 행복해졌다. 그 순간이었다. 나는 이들처럼 다만 “함께”이기를 꿈꾸게 되었다. 동시에 깨달았다, 이 꿈을 처음 꾼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앙상블, 조화를 전제로 한 다양성


앙상블 연주를 하면 가끔 역설적인 상황에 부딪친다. 연주자들끼리 사이가 좋아서 음악의 맛이 사라져 버리는 경우다. ... 다들 적당히 괜찮은 연주를 하지만 밋밋하고 매력 없는 음악이 되는 것이다. 다른 의견을 내는 용기와 그로 인한 갈등까지도 음악의 재료로 탁월하게 쓸 때, 악보를 넘어서는 미세하고 다채로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음악이 화합의 상징인 까닭은 모두 한목소리로, 한 가지 방법으로 노래해서가 아니다. 서로의 다름이 다양한 방법으로 어울리기 때문이다. - 송은혜, <음악의 언어> 중


위 구절을 읽은 나는 충격을 받았다. 앙상블에 대한 내 무의식적 전제에 균열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나는 은연중에 앙상블을 한 목소리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여러 개체화 된 한 사람의 묶음을 이상적인 앙상블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앙상블은 동일성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수가 아닌 복수를 전제하는데, 복수의 인간들이 같을 리 없다. 모두 같아서 조화로운 세상은 끔찍하다.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이다. 인간은 획일화 된 사회, 전체주의 사회에 저항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공산품이 아니며 공산품이기를 거부함으로서 존엄성을 지키는 존재다. 다름, 때로 대립과 갈등을 야기하는 다양성이야말로 앙상블의 전제일 수 있었다. 책이 깨쳐준 사실이다.


나아가 저자 송은혜는 말한다. 내 의견을 피력하지 않음으로써, 그러니까 ‘좋은 게 좋은’ 입장을 취함으로써 오히려 긴장감을 잃고 그저그런 앙상블로 끝날 수 있다고. “악보를 넘어서는 다채로운 감정”은 이 대립과 갈등의 충돌, 봉합 또는 인정에서 비롯될 것이다.


다만, 파국 혹은 평행선을 이루는 불협은 앙상블일 수 없을 것이다. 불어사전 속 다양한 의미를 조합해보면, ensemble은 함께하는 개별성의 전체/총체인 동시에 조화harmonie이다. 개(별)성이 앙상블의 전제이듯 조화 역시 앙상블이 담지한 본래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개별성과 개성은 어떤 방식으로든 조화에 이르러야 비로소 앙상블이라는 어휘 본래의 의미를 충족하게 된다. 그런 견지에서 보자면 조화라는 결과 만큼이나 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조화는 결과다. 조화 이전에 다름이 있었으니, 다름이 조화로 나아가는 과정이야말로 진귀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합창과 합주라는 앙상블을 나는 그렇게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눈을 맞추고 호흡을 맞추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귀기울이고 상대를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내 목소리를 또렷하게 내어야 한다. 조화롭지만은 않은 일련의 과정 끝에 앙상블에 도달할 때 우리 각자는 마침내 자기 이상의 존재가 된다. 한순간 나는 나를 넘어서는 존재로 거듭난다. 이건 전체주의도 파쇼도 아니다.


대립과 충돌이 만들어낸 명반 : 글렌 굴드, 줄리어드 현악 4중주단의 슈만 피아노 4중주 Op.47


이제 글렌 굴드와 줄리어드 현악4중주단의 슈만 피아노 4중주에 어째서 끌리는지 이해가 된다(일단 앨범 자켓이 아름답다. 이 앨범을 소장할 수 없다니. 슬프다). 나는 이 곡 3악장을 전쟁 같은 사랑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이 연주에 대한 정만섭 아저씨 설명을 떠올려본다. 글렌 굴드는 레너드 번스타인의 지휘에도 아랑곳 않고 자기 페이스로 피아노를 쳤다고 한다(번스타인 할아버지가 어떤 대인배였는지 모르겠지만 분노가 폭발하거나 진땀이 났을텐데. 이럴 거 글렌 굴드는 애초에 왜 녹음을 하겠다고 싸인한건지도 의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대목은 여기 이어진다. “하지만 줄리어드 현악4중주단이 어떤 단체입니까? 여기 지지 않고 연주하죠. 놀랍게도 이 과정에서 명반이 탄생합니다.”


나는 3악장 안단테 칸타빌레를 무척 아끼는데 특히 첫 프레이즈에서 피아노는 당당당당당당당당, 심술처럼 무심하고 도드라진 반주를 해 나를 웃게 한다. 이를 뚫고 주제를 연주해야 하는 첼로와 바이올린은 묻히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소리 높여 잰걸음으로 피아노가 설정한 박자를 쫒는다. 이 정황이 모두 들리는데 이상하게 명연이다(물론 9분여의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합이 맞아들어가는 느낌이 들긴한다. 인간의 심술이 앙상블을 향한 무의식적 지향에 굴복한 느낌이랄까). 아무리 들어봐도 좋다. 다른 연주단체의 같은 노래를 들었더니 거의 다른 노래에 가까웠다. 그 역시 좋았지만 글렌 굴드와 줄리어드 현악4중주단 조합이 전하는 종류의 강렬함은 전달받지 못했다. 대립과 갈등이 하도 커서 그를 아우르려면 거대한 조화의 에너지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 거대한 에너지 덕분에 좋은 연주를 뛰어넘어 명반이 탄생한 건 아닐까?


나는 자주 함께를 꿈꿨다. 대학원에서는 똑똑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우리 선생님 제자들을 모아 공동체를 만들고 싶었다. 수유 너머 보다는 영화 ‘다가오는 것들’에서 그르노블 산중 농가에 모여 사는 젊은이들 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나는 그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끝없이 생산할 수 있는 안정적인 환경을 조성하고 유지하는 관리인이 되고 싶었다(안테나 사장님 유희열의 마음이 이런 게 아니었나 짐작해본다). 그러면 나는 그 이야기를 끝없이 들을 수 있을 터였다. 어느 순간엔가 산산조각났지만. 다이어리 올해의 단어 페이지 한 귀퉁이에 ‘Ensemble, c’est tout’라고 적으면서는 회사에서 당시 같이 일하던 우리 그룹 다섯 명이 오래오래 함께 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 얼마 못 가 사업적 이유로 흩어졌지만.


나는 늘 좋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랐다. 아무나 모여서 앙상블을,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건 아니므로 함께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내게 언제나 중요했을 것이다. 폐쇄적이고 인간관계에 믿음이 적기 때문에 오히려 좋은 사람을 희구하게 되었을 것이다. 가치체계를 공유하는 결이 같은 사람들이 가족 아닌 가족 같은 공동체를 이루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바랐던 것 같다. 서로를 이해하고 무한한 선의로 대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지켜주고 서로를 풍부하게 해주는 이야기 말이다. 물론 그들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과 대립은 그 결속을 더욱 단단히, 그 결과를 더욱 풍성하게 할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꿈꾼다.


Ensemble, c’est tout.

 


음악

슈만, 피아노 4중주 Op.47, 3악장 안단테 칸타빌레 : 유튜브에서 듣기

송은혜, <음악의 언어>, 시간의 흐름, 2021

영화

Ensemble, c'est tout 함께 있을 수 있다면,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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