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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Aug 16. 2021

#31 명연주 명음반을 즐기는 다른 방법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와의 낮잠

명연주 명음반을 청취하는 최고의 자세는 머리맡 라디오를 틀어둔 채 침대에 눕는 것이다. 절판된 음반, 희귀 음반이 방송되길 기다리는 일은 90년대 주말의 명화를 기다리는 마음과 비슷하다. 지방에 사는 중고생에게 영화 접근성이 높지 않던 때였다. 남자친구에게는 80년대 프로그레시브 락을 소개해주던 성시완의 라디오 프로그램이 그랬겠지. 테이프에 녹음도 많이 했다던데. 기대한 음악은 좋을 수도 있고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끝날 때도 있지만 어떤 쪽도 좋다. 운이 좋으면 침대에 누워 방안을 채우는 음악 소리로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 수 있다.


너무 운이 좋은 날에는 음악을 기다리다 잠이 든다. 3시 쯤 시작할 집중 감상곡을 기다렸는데 첫곡을 들으며 잠들어서 클로징 멘트를 들으며 깨어난 적도 있다. 그 허망함이란. 동시에 이런 잠은 유난히 달콤하다. 너무 달아서 듣다 시나브로 잠드는 (불)운을 기다리는 날도 있을 정도다. 지친 심신을 이렇게 평안하게 해주는 기제를 나는 별로 발달시키지 못했다. 명연주 명음반을 들으며 자는 낮잠은 희귀한 기회인 것이다. 그래서 듣다 잠드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한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로 한다.


오늘 명연주 명음반에서 소개될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의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번을 벌써 얼마 전부터 벼르고 있었다. 지난 번 리히터의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글을 쓴 후 이 신비로운 연주자의 다양한 연주를 듣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지난 수요일 리스트 연주를 놓쳤기 때문에 의지는 더욱 불타올랐다.


의지를 수마睡魔가 덮쳤다. 아마 첫 번째 집중 감상곡을 듣다 당한 것 같다. 잠에서 깬 후 리히터의 라흐마니노프를 5분 가량 들었다. 감사할 일이다. 타건은 강력한 듯 한데 또 달콤한 것도 같았다. 낭만적이었던 것도 같다. 음악보다는 낮잠에 대한 인상인지도 모르겠다. 아직 잠결일 때, 리히터가 라흐마니노를 연주한 게 다행이라는 말을 들은 것도 같다. 정확한 악보를 연주로 옮기는 데 강박적이었을 법한 이 연주자는 마음에 들지 않는 곡은 아예 연주를 안했다는데, 라흐마니노프를 전혀 듣지 않는 나지만 이 까다로운 사람이 연주하기로 결정한 곡이라면 어떻게 연주했는지 궁금해진다. 오늘 방송된 녹음을 구할 수 있을지, 유튜브에서라도 들을 수 있을지 찾아봐야겠다.


이참에 브뤼노 몽생종의 리히터 책을 열어봐야겠다. 몽생종이 리히터에 대해 남긴 영상물 ‘이니그마’에 대한 코멘트를 듣고 구하려 해봤지만 쉽지 않았다. 책을 통해서라도 그에 대해 알아야겠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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