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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Sep 07. 2021

#32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파울 바두라-스코다 시대악기 녹음 전집

“역사적 녹음”이라니. 얼마나 매력적인 셀링 포인트인가. 나는 이 문구에 얼마나 쉽게 영업을 당하던가. 파울 바두라 스코다 Paul Badura-Skoda 가 연주하는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집.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슈베르트’ ‘피아노’의 양에 자신이 없었지만 무려 1800년대 초중반 비엔나에서 제작된 오리지널 포르테피아노로 녹음했다는 이 “필청 음반”을 주문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명연주 명음반에서 들려준 B플랫 메이저 D.960이 첫눈에 인상 깊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1800년대’ ‘비엔나’에서 제작된 피아노들이 진동하는 공기를 느껴보고 싶었다. 게다가 비엔나 토박이가 고증에 따라 철저히 연구한 슈베르트라는 점이 호기심과 도전의식, 무모한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이건 고전 원전을 고어로 연구해 읽는 것과 같은 퍼포먼스다. 90년대에 이미 엄청난 기획을 실현해낸 것이다. 고전, 원전, 고어, 연구. 모든 요소가 나를 저격한다. 무엇보다 비엔나, 비엔나가.


9장의 CD에 담긴 20개의 소나타는 신선한 오래된 통조림 같다(D960 1악장을 제외하면 내게는 모두 새로운 곡인데 이제 전곡을 한두 번 들은 내가 할 수 있는 감상은 인상평에 가깝다). 연주에 사용된 다섯 대의 포르테피아노 중에서도 특히 1825년 산 콘라드 그라프의 음색이 내 귀를 사로잡았다. 현대 피아노보다 울림이 적고 타격감이 강하다. 저음은 상대적으로 폭넓고 둔중해서 저음과 고음 사이 음색의 대조가 강하게 느껴진다. 저음과 고음의 톤이 다르다보니 악기 조율이 잘못된건가 싶기도 하지만 이 고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마치 고음부에만 더 얇은 펠트를 댄 것처럼 유난히 청순하고 맑게 울리는 것이다. 현대 피아노에서 내가 불편해하곤하는 풍부한 울림과 웅장한 요소, 그것이 주는 드라마틱함(내게는 다소 느끼한 감동이다)이 자연스럽게 제거된 소리가 더 없이 상큼하고 신선하다.


이 청아한 음색에서  왠지 클라라 하스킬의 소리가 떠올랐다. 그녀는 포르테피아노 음색을 기억하는 마지막 피아니스트 같은 소리를 낸다. 그 무심하고도 간결한 연주 스타일이 실제 포르테피아노로 구현되는 소리를 들어보고 싶다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게 한다.


이 정도 인상평은 3주 전에도 쓸 수 있었지만 나는 좀 욕심을 내고 있었다. 바두라 스코다는 전집에 60페이지짜리 북클릿을 넣어두었다. 그것도 본인이 직접 써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에 비견될만큼 중요한 작품인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가 오랫동안 저평가되어 왔던 데 성토(?)하고, 각 소나타에 대해 설명한다. 나는 이 연구서를 모두 읽은 후에 글을 쓰고 싶었다. 더 많은 이야기와 지식을 글에 녹이고 싶었다. 서문만 읽은 지금 이 글을 쓰는 건 영원히 못쓰느니 뭐라도 쓰는 게 낫다는 현실적 판단에 근거한다. 언젠가 다 읽고 더 들으면 이 전집에 대한 다른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바두라 스코다는 후에 다른 음반에서 D.960를 세 번 연주한다(2014). 1826년산 콘라드 그라프 포르테피아노, 2004년산 스타인웨이, 1923년산 뵈젠도르퍼로. 같은 연주자가 같은 곡을 세 개의 다른 악기로 연주한 버전이 연이어 나온다는 점이 이 앨범의 매력이다. 곡과 연주자를 상수로 놓고 악기라는 변수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비교할 수 있다니! 내게는 너무 흥미로운 기획이다. 아이폰과 아이팟에 의존한 감상이 스스로도 미심쩍지만, 1악장만 비교해봐도 피아노라는 악기가 어떻게 진화해왔는지 들리는 듯 하다. 매끈하고 거대한 스타인웨이보다는 뵈젠도르퍼가, 그보다는 콘라드 그라프가 담백하다. 피아노라는 악기의 에센스를 더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고나 할까.


그중 뵈젠도르퍼 연주를 특히 주의깊게 들은 건 정명훈이 뵈젠도르퍼로 연주한 모차르트의 '아, 어머니께 말씀드릴게요" 주제에 의한 12개의 변주곡 라이브 연주 영상 때문이다. 물론 제작 시기가 같을 리 없지만 이 영상 속에서 정명훈이 연주한 뵈젠도르퍼의 맑고 청아할 뿐 아니라 유난히 땅땅하고 딱딱한 소리가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인상 깊게 남아있다. 바두라 스코다의 뵈젠도르퍼에서도 그런 소리가 날지 궁금했다. 내가 듣기엔 바두라 스코다의 뵈젠도르퍼가 훨씬 부드러운데 그건 연주자의 차이일까, 곡이 요구하는 해석의 차이일까(물론 악기사는 같지만 악기가 다르니 음색이 다를 가능성도 충분하다. 스트라디바리라고 다 똑같은 바이올린 소리를 내지는 않으니까). 내게는 흥미진진한 요소였다.


뜻밖에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나는 꽤 좋아하게 되었다. 물론 마음 속으로 슈베르트야말로 내가 들을 수 있는 최후의 낭만주의 작곡가라고 내심 선을 그어두고 있긴 했다. 그러나 그의 피아노 소나타가 이렇게 많은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졌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바두라 스코다가 전적으로 옳다. 베토벤처럼 피아노로서 자신을 노래했던 슈베르트의 소나타들이 당대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저평가된 건 안타까운 일이다. 굳이 말하자면 나는 베토벤보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가 더 좋다.


슈베르트는 정말 아름답게 노래한다. 그 노래가 사람의 음성으로 연주되는 그의 성악곡이 유명한 게 당연하게 느껴진다. 나는 피아노에서 성악곡과 같은 종류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반면 슈베르트에 풍부한 아름다운 멜로디를 베토벤에서는 느껴본 적이 없다. 슈베르트 노래의 아름다움은 단조롭거나 피상적이지 않다. 그는 아름다움 속에 약간의 공포심을 매복시켜두기 때문이다. 두려움과 불안이 드리우는 그림자는 해맑은 주제에 미묘한 무게를 싣는다. 기묘한 균형이 이루어진다. 더 들어볼만한 작품집이다. 아마 나는 더 자주 슈베르트의 피아노를 듣게 될 것이다. 인상평을 넘어서는 풍부한 감상을 말하게 될 날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본다.



파울 바두라 스코다의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D. 960 1악장 Molto moderato

Conrad Graf : 유튜브에서 듣기

Bösendorfer: 유튜브에서 듣기

Steinway : 유튜브에서 듣기

정명훈, 모차르트 "아, 어머니께 말씀드릴게요" 주제에 의한 12개의 변주곡 : 유튜브에서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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