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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Sep 14. 2021

#33 계절 의식 :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

다니엘 뮐러-쇼트와 덴마크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 실황(2014)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 생각이 나긴 했다. 그래도 아직 8월 중순인데 너무 이른 거 아닐까? 이건 가을 음악이잖은가. 지독한 여름이 이렇게 맥없이 물러날 리 없다.고 생각했으나, 내 주장에 아랑곳 않고 8월 마지막 날 아침 클래식FM에서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 1악장이 흘러나왔다. 감각과 직관이 이성과 원칙에 무안을 준다. 가을이구나. 8월도 가을일 수 있구나. 모든 것을 불태울 기세로 타오르던 여름도 끝나는구나.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은 대표적인 첼로 레파토리다. 첼로를 위해 작곡된 곡은 피아노나 바이올린에 비해 적다. 그래도 걸출한 작품들이 있다. 첼로를 넘어 음악적으로 성스러움의 반열에 오른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첼로의 신약성서라고 불리는(내 생각은 다르다)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 드보르작 만큼 많이 녹음 되었을 엘가의 첼로 협주곡,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만큼 친애하는 브리튼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사랑받는 소품도 많다. 비발디의 첼로 소나타들,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차이코프스키의 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 등등. 여기 다 쓰기에 지면이 부족할 정도는 될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드보르작의 위상은 남 다르다. 브람스가 남겼다는 말만 봐도 그렇다.


첼로로 이런 걸 할 수 있을 줄 알았으면 나도 첼로 곡을 더 많이 썼을텐데.


그러나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에 대한 세간의 찬사를 내가 납득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유명하다는 연주들을 들어봐도 감흥이 일지 않았다.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곡의 전개는 종잡을  없었다. 감정적인 인과관계와 논리가 보이지 않았다. 내게는 1악장 전체가 미치광이 같았다.  미치광이는 내게 불같이 화를 내다 갑자기 나를 끌어 안더니  따귀를 올려 붙였다.


다니엘 뮐러 쇼트와 대니쉬 내셔널 심포니의 2014 연주 실황. 내가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을 이해하게   순전히  실황 영상 덕분이다. 강조는 반드시 ‘영상 붙어야 한다. 같은 실황을 청취만 했다면 이런 결과에 도달했을지에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독주 첼로를 연주하는 다니엘 뮐러 쇼트 Daniel Müller-Schott 의 곡 해석은 무척 훌륭하고 설득력 있다. 마스터 클래스 영상을 보면 언어와 티칭(그리고 지나치게 멋진 그의 노래! 음색이 정말 아름다워서 첼로 소리와 그의 허밍 사이에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그가 노래하는 부분을 듣기 위해 영상을 반복 재생할 정도였다)을 통해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이 명확해지는데, 기본적으로 엄청난 에너지와 기운을 전제한다. 특히 그는 내가 미치광이 대목이라고 부르는 첫 주제, 첫 프레이즈, 무엇보다 첫 음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데 적잖은 시간을 할애한다. 호흡을 내뱉으며 온 체중을 활에 실어 봐앙! 하고 그어야만 한다(물론 모든 첫 음은 중요하다). 좋은 착점이다. 이 에너지로부터 발생하는 감정적 낙차가 클수록 이어지는 2주제의 서정적 멜로디가 돋보인다고 나는 믿는다. 드보르작 특유의 서정이 빛을 발하는 부분 말이다. 미치광이의 에너지가 강렬할수록 아름다운 노래는 더 포근하게 나를 감싸안는다. 다니엘 뮐러 쇼트는 이 서정성을 긴 호흡으로 처리한다. 설득력 있는 해석이다. 아름다운 멜로디가 증좌다.


이제 영상의 특별함이 언급될 차례다. 이 실황 영상은 곡의 형식과 구조를 완벽하게 시각화 한다는 점에서 매우 탁월하다. 영상을 따라 음악 전체의 주요 멜로디와 주선율을 맡은 악기가 시각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난다. 마치 지휘자 총보의 노트를 다 읽은 듯한 카메라 워크는 곡의 흐름을 놓치는 일이 없어서 청각 뿐 아니라 시각적 리듬감과 긴장감을 조성한다. 그러니까 이 영상은 내게 완벽한 학습자료였다!


나는 도입부부터 영상에 매료되었는데, 드보르작이 이 곡에서 관악기를 얼마나 중요하게, 동시에 체계적으로 사용하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클라리넷에서 오보에와 플룻을 지나 호른으로, 다시 호른에서 클라리넷과 오보에가 주고받는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악기들 사이의 유기적인 관계를 포착할 수 있게 된다. 관악기들은 낮은 음역에서 높은 음역으로, 혹은 반대로, 거의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다. 오보에와 플룻이 병치되거나 클라리넷과 오보에가 주고 받는 식이다. 이런 악기 사용이 내게는 매우 논리적이고 합당하게 느껴진다. 뿐만 아니라 한 단계의 음역 차를 둔 두 관악기가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서 무척 아름답다. 이는 후에 첼로와 관악기가 주고 받을 때 역시 마찬가지여서 두 악기 사이의 상호작용은 긴밀하고도 치밀하다. 현악기들이 압도적으로 거대한 폭포수 같은 볼륨을 만든다면 관악기들은 곡에 서사와 뉘앙스를 부여한다. 물론 첼로는 이 폭포수와 노래하는 새들에 묻히지 않고 있는 힘껏 자기 소리를 내어야 한다. 주인공이 감당할 몫이다.


특히 좋아하는 부분은 도입부에서 호른이 제시하는 2주제다. 이 부분에서는 호른이 주목받아야 마땅하다. 호른의 높고 부드러운 음색이 아름다운 솔로로 연주되기 때문이다. 이 오케스트라의 호른도 나쁘지 않지만 베를린 필 호른 주자 솜씨를 꼭 보고 싶었는데, 연주영상을 찾을 수 없어 아쉽다. 첼로 솔로에 미스터리한 뉘앙스를 더해주는 역할 역시 관악기가 맡는다. 이 뉘앙스를 더하는 바순, 플룻을 독주 악기와 교차해 보여주는 영상이 둘 사이의 호흡을 느끼게 한다. 동시에 시각적 긴장감을 배가한다. 첼로 주자는 오케스트라를 등지고 있지만 두 파트는 서로를 귀기울이며 상호작용하(려 애쓰)겠지. 호른이 도입부에서 제시한 2주제를 독주 첼로가 연주할 때 바야흐로 내 최애 장면이 등장한다. 선율을 연주하는 첼로 연주자 뒤에 흐릿하게 비치는 비올라 연주자의 얼굴에서 나는 내 표정을 발견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멜로디에 흠뻑 젖어든 표정을 말이다. 연주 중인 곡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는 연주자의 모습이라니, 정말 좋은 샷이다. 연주 끝까지 독주 첼로와 오케스트라의 케미는 이어진다. 아니, 폭발에 폭발을 거듭한다. 기념비적 실황이자 영상이다.


이 곡을 낯설게 하는 건 체코의 민족적 혹은 민속적 색채가 아니었을까 싶다. 모차르트나 바흐의 오스트리아/독일 음악에 익숙한 내게 드보르작의 멜로디와 화성은 언제까지나 이국적이다. 드보르작은 이국적인 땅의 거대한 자연을 내 눈앞에 펼쳐놓곤 한다. 때로는 끝없이 펼쳐지는 겨울의 검은 숲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촬영한 영상을 보고 있는 듯한 평온함과 고요함을, 때로는 그 검은 숲속을 헤매는 긴장감을, 때로는 이 모두를 빨아들이는 거대한 폭포수 같은 경외감을 선사한다. 이 낯선 자연을 나는 그의 음악을 들으며 자주 상상한다. 드보르작의 마법은 그러나 서정적인 멜로디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그 마법은 Klid (Silent Woods)처럼 고요하고 따뜻할 때도 있고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노래’처럼 구슬플 때도 있고 첼로 협주곡 1악장 2주제처럼 감동적일 때도 있다.


이 곡이 가을 곡인건 이 곡에 찬 바람이 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 곡이 너무 덥고 후끈해서일까? 쓰는 내내 생각해봤는데 아마도 답은 후자인 것 같다. 이 연주 실황을 떠올리기만해도 몸이 뜨거워진다. 낯선 이국의 작곡가에게서 가을 초입을 느낀다.



음악 듣기

Antonin Dvorak, Cello Concerto in b-minor Opus 104, Danish National Symphony Orchestra, Daniel Müller-Schott(cello) : 유튜브에서 듣기

Antonin Dvorak, Klid (Silent Woods) , Op. 68/5, Jean-Guihen Queyras)cello) : 유튜브에서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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