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디갔어, 버나뎃>

by 만정
새로운 캐릭터 영화의 전형, 혹은 위대한 케이트 블란쳇

2014년 이래로 내게 ‘캐릭터 영화’는 곧 <프란시스 하>였다. 배우 그레타 거윅과 영화 속 인물 프란시스는 불가분했고 영화는 곧 프란시스이자 그래타 거윅이었다(노아 바움벡 감독에게는 유감스러운 일일지 모르지만, 이건 그레타 거윅의 영화다).


2021년, 나는 캐릭터 영화의 새로운 전형을 발견했다. 버나뎃으로 화한 케이트 블란쳇은 위대한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아니, 위대한 케이트 블란쳇은 걸작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원작 소설의 키치한 책 표지를 멀리했던 나는 영화 속 버나뎃에게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었다(사실, 버나뎃인지 버나뎃을 연기한 케이트 블란쳇인지 아직도 정확히 분간이 되지 않는다).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는 대단했다. 그녀는 배우 외에 다른 형태로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대사 처리는 물론, 표정과 손짓, 몸짓 하나까지 1초도 버나뎃이 아닌 순간이 없다고 느껴졌고 이 집중력은 나를 영화로 완전히 몰입시켰으며 반복적으로 끌어들였다. 머리 스타일과 의상(심지어 스카프 한 장과 낚시 조끼까지도)까지 버나뎃을 위한 장치로 온전히 활용된다. 물론, 당연한 사실 하나를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케이트 블란쳇이라는 배우의 외모는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사람을 끌어들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 말이다.


평범한 듯한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링클레이터의 현란한 솜씨

영화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버나뎃의 과거를 밝히는 방식이다. 지금, 시애틀이라는 도시에 살고 있는 버나뎃은 육아에 전력투구한 십 수년 동안 이웃들과 문제를 일으키고, 사람 만나기를 어려워하는 사회 불안증 “환자”, 적응 장애 “환자”처럼 보인다. 가장 간단하고 일상적인 일조차 해낼 수 없이 엉망이 됐다고 스스로도 인정하는 이 인물의 과거를 드러내는 데, 링클레이터는 영상 에세이라는 장치를 사용한다.


이 영상물은 20년 전, 건축계의 스타이자 아이콘이었던 버나뎃에게 일어난 영욕의 사건들을 기념 영상 형식으로 재구성한, 일종의 영화 속 영화다. 액자 형식으로 삽입된 이 영상물이 볼 때 마다 나를 웃게 한다. 이런 류의 영상물이 흔히 취할 법한 전형적인 내레이션과 인터뷰 편집, 음악 사용으로 장르의 특징을 기가 막히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마치, 코엔 형제의 영화 <헤일, 시저>에서 뮤지컬 영화, 정통 드라마, 수중 발레 영화, 서부극, 성경 대하 사극 등 각종 영화 장르의 전형을 솜씨 좋게 한 시퀀스씩 만들어낸 것을 볼 때 같은 재미를 느꼈다.


버나뎃이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한 소위 ‘전문가’와 친구가 내놓는 서로 다른 해석과 처방을 두 개 대화의 병치로 연결한 것도 좋았다. 원작을 읽지 않아 판단이 어렵지만, 영화적 각색이 훌륭할 것임을 짐작케 한다(하긴 영화 속 대화에 대해서라면 링클레이터가 일가를 이루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비포 시리즈의 감독이잖은가). 링클레이터는 확실히 과소평가 받는 감독이다. 나는 쓰잘 데 없는 작은 얘기나 하는 것 같아 보이는 그의 잘 만들어진 드라마들(특히 <에브리바디 원츠 썸!>)을 정말 좋아한다.


엄마와 딸의 아주 특별한 관계

나를 영화로 반복해 끌어들이는 이야기 요소 중 하나는 서로에 대한 온전한 신뢰관계를 구축한 버나뎃 모녀의 이야기이다. 그들의 유별나게 애틋한 관계는 꾸준히 표현되지만, 이 관계의 특수성을 한 마디로 말하면 아래와 같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엄마를 사랑한다.”


이건.. 이건 너무 사랑스럽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지금이라도 난자를 얼려야 하는 건 아닌가 고민하게 한다. 이웃이, 남편이, 전문가가 나를 ‘미친 년’으로 만드는 와중에도, 나를 믿고 이해하는 존재가 있고, 그게 딸이라면, 난자를 얼릴지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비는 세상에서 가장 확실하고 든든한 버나뎃 편이다(역의 관계도 성립하리라 믿는다).


모녀가 차안에서 ‘Time after Time’을 틀어놓고 크게 부르는 장면이 진부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씬이 마음에 유독 남는 다른 이유는 이어지는 버나뎃의 고백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인생의 따분함과 남은 16개의 계시(vision)


버나뎃 : (울먹이며) 엄마는 가끔 너무 힘들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비 : (차분하고 다정하게) 뭐가 힘들어요?

버나뎃 : 인생의 진부함(banality of life). 하지만 남들은 눈치채지 못하는 작은 것들에 감동하지. 좋든 싫든 말이야.


버나뎃의 대사를 나는 감히 온전히 이해한다고 하겠다. 바로 저 마지막 인용구를 나는 오랫동안 혼자 마음으로 읊조리곤 했었던 것이다.


말도 안되는 멀미약을 받으러 가면서도 약국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가 누구 작품인지 대번에 알아보고 그것으로 약국 직원에게 말을 걸 때 버나뎃은 ‘정상적’이고 신나 보인다. 그 직원이 ‘치훌리’ 따위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을 때, 그래서 이 대화를 멀리 내던져버리고 대화를 거절할 때, 버나뎃은 실망/절망한다. 나는 그 순간 버나뎃 감정의 낙차를 보았다. 그렇게 고립된 “현실”로 돌아온 순간, 버나뎃은 이상한 약을 처방받아 온 다루기 힘든 손님으로 변모한다.


버나뎃은 이상하지만 이상하지 않기도 하다. 버나뎃은 환자이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다. 그것은 그녀를 둘러싼 환경이 결정하는 거 아닐까? 이를테면, 치훌리를 아는 건축계 동료들에게 샹들리에 이야기를 했다면 흥미로운 대화가 이어졌을 것이라고 나는 상상한다. 버나뎃은 불안증 환자에 문제적 이웃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미적감각과 재능을 펼칠 수 있는 환경에 속하는 즉시, 열정적이고 전혀 까다롭지 않으며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될 수 있다. 여기에는 조금의 노력도 필요 없으리라. 20년 만에 만난 건축계 동료가 불안으로 인생을 낭비한다는 버나뎃의 자기 서사에 빨간 줄을 죽죽 긋고, 일로 돌아가 뭐라도 창조하라고 한 건 정확히 이런 맥락의 조언이자 처방이었을 것이다.


정신과 진료라는 것은 미묘하고 까다로운 문제를 수반한다. “사회생활에 문제가 될 때” 병원을 찾아야 한다고 의사들은 말하곤 한다. 그리고 진료 과정에서, 진료의 목표는 “사회생활에 문제 없도록”에 있다는 것을 내담자는 깨달아가게 된다. 진료로서의 상담이 계속되는 동안 자연스럽게도 체제 순응적인 기준들로 나를 재는 과정을 겪는다. 내가 적응해야 하는 ‘사회’에 대한 질문보다는 그 사회와 갈등을 일으키는 ‘나’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적당히 회사생활을 유지하고 남들처럼 결혼을 해서 가정이라는 안전그물을 하나 더 치고 남들처럼 아이를 낳고… 불안에 대응하기에 사회 다수의 편에 서는 것이 유리하기는 할 것이다. 이쯤되면 이런 생각에 이른다. 지금까지 내가 쉽게 살아온 건 내가 “우연히도” 사회가 요구하는 좋은 삶을 내면화했기 때문이었을 따름인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다. 사회적으로 정의된 “정상적인” 혹은 일반적인 삶으로부터 1 밀리미터라도 벗어나는 순간, 삶은 생각보다 빠르고 정신없이 흔들린다. 풍전등화랄까. 나를 보호해주던 바람막이들을 걷어낸 벌판에 홀로 서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현대 정신의학적인 접근의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적당히 회사에 다니니까. 물론 내가 세뇌당한 건 아니다. 평균적인 삶을 카탈로그처럼 제시해주면 내게 잠시 선택의 여지가 생기(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 카탈로그를 제시해줬을 때 나는 상담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이 기준을 따르기로 결정(혹은 포기)한 셈이다. 그게 현재 스코어, 내가 택한 치료법(혹은 삶을 견디는 법)이다. 아슬아슬한 줄타기이지만 그런대로 익숙해져가고 있다.


그러나 결국 나를 구하는 것은 마주하기 싫은 환경을 견뎌내는 방법을 갈고 닦는 것 보다는 내가 실현해야 하는 내 비전이자 계시에 집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남극의 버나뎃을 보면 그렇다. 견디는 방법을 배울 게 아니라 흥미로운 것을 정신없이 좇는 것 말이다. 원하는 것, 아름다운 것에 집중함으로써 싫은 것, 안되는 것들은 시야에서 쉽게 벗어나곤 한다. 감사하게도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나는 좋은 의사를 만나고 있지만 내게 더욱 필요한 건 나를 잘 알고 이해하며 믿어주는 가족과 동료인지도 모른다. 바흐와 모차르트, 줄리언 반즈와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에 대해 자기 검열 없이 말할 수 있는 동료와 세계 말이다.


그런 세계가 존재하기나 할까?


복잡한 세계에서 만난 쉼표 같은 영화에 끝없는 도돌이표가 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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