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내가 산 책(과 음반) - 22/01/05

김규연, 웨스 앤더슨. 약간의 과학을 곁들인,

by 만정

김규연 <Voyage>

작년 가을 피아니스트 김규연 신보가 나왔던가보다. 김규연은 서울대 음대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 피아니스트 가운데 내가 가장 신뢰하는 연주자다(내가 찾아듣는 유일한 한국인 피아니스트다). 재작년 클래식FM KBS 음악실 출연이 계기였다. 라모 연주와 해석이 좋았고, 바로크 음악 문법에 대한 설명이 무척 인상 깊었다. ‘연구’하는 연주자로서의 학구적인 면모가 나와 조응했을 것이다. 그런 그의 이전 녹음-라모와 슈베르트 즉흥곡-을 구할 수 없어 늘 아쉬웠다.


새 음반 <Voyage>는 선곡으로 단박에 나를 저격했다. 첫 트랙이 무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내가 아는 가장 관능적인 음악. 나는 한때 비르기트 닐손이 부르는 ‘사랑의 죽음’에 완전히 빠져있었다. 그런 곡이 첫 트랙이라니. 이 엉성한 우연이 반가웠다. 하지만 결정타는 슈베르트 즉흥곡 D.935. 맙소사. 이건 사야 해.


즉흥곡 3번의 경우, 평소 즐겨 듣는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에 비해 덜 투명하고 더 차분하다. 김규연은 맑게 위로 띄우는 소리보다는 그 소리를 담요로 덮어 감싼 듯한 소리를 만들고 있었다. 시각적으로는 대류가 일어나는 공기가 연상된다(특히 따뜻한 공기가 아래로 떨어지는 부분이다. 천천히 봉그랗게 내려오는 빨간 곡선에 화살표를 그려보자). 청각적으로는 소프라노(지메르만)가 부르던 노래를 메조나 알토의 목소리로 듣는 듯한 경험이다. 같은 음표인데도 음의 무게가 완전히 다르다. 김규연 특유의 성숙함과 차분함, 지적이고 사색적인 면모는 이런 음색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템포와 프레이징도 익숙한 지메르만과는 달라서 흥미로웠는데, 해석의 차이를 확실히 하려면 몇 번 더 들어봐야 할 것 같다. 여튼 반가운 선곡과 귀기울이게 만드는 음색에 이미 난 구매자가 되어 있었다. 슈베르트에 이어 바흐로 앨범을 마무리 한 것도 내게는 킬링 포인트였다. 바흐는 언제나 옳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곡들로 채워진 앨범 구성에 흥분하는 한편으로, 바흐 파르티타나 프랑스 모음곡 전곡처럼 묵직한 연구서 같은 앨범이 아니라는 데 대한 아쉬움이 떠나지 않는다. 내가 좀 구식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여전히 전곡 앨범을 좋아한다. 또는 트랙 사이의 관계가 유기적인 쪽을 선호한다(이 앨범의 트랙 구성은 유기적이라기보다는 연상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진지한 연주(또는 연구)라고 생각하는 편향이 있다. 그녀의 해석과 연구를 흥미롭게 지켜보는 내게는 논리적인 기대인지도 모르겠다. 김규연에게 바두라 스코다의 슈베르트 소나타 전곡 녹음이나 머레이 페라이어의 바흐 시리즈 같은 것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위에 언급한 바흐의 두 모음곡을 그의 녹음으로 꼭 들어보고 싶다는 개인적인 바람이 생겨났다.


마지막으로, 씨디에 포함된 연주곡 소개 책자를 김규연이 썼다면 더 좋았을 뻔 했다. 자신의 곡 해석을 참 잘 설명했을 텐데. 언젠가 그녀가 라모와 바흐, 슈베르트에 대해 쓴 것을 읽어보고 싶다. 사실 같이 이야기 나누고 싶은 사람인데, 아마 그럴 일은 없을테니까. 이 무거운 기대는 그녀 자신이 내게 심어놓은 것이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녀가 연주(구)자로서 멋진 음반들을 꾸준히 내놓길 바라본다.


웨스 앤더슨, ‘프렌치 디스패치 대본집’

웨스 앤더슨, ‘프렌치 디스패치 대본집’

나는 웨스 앤더슨의 묻지마 구매자다. 신작이 나오면 일단 본다. 영화 내용과 무관한 결정이다. 작년에 개봉한 ‘프렌치 디스패치’ 오프닝 시퀀스만 봤는데, 이미 걸작의 기운이 풍긴다. 건물 외관을 보여주는 단순한 신조차 단순하지 않다. 미술과 편집이 모두 그렇다. 웨이터가 서빙 준비하는 신이 이렇게 현란할 일인가? 이 대목에서 이미 나는 완전히 홀리고 말았다.


동시에 이 영화의 밀도가 전에 없이 높을 것임을 직감했다. 내 뇌는 이 영화의 시각적 정보와 대사를 동시에 처리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십분만에 시청을 중단한 이유다.


흔한 일은 아니다. 보통은 반복해서 이미지와 대사 양쪽을 이해하고 외울 때까지 보기 때문이다(계속 보면 알게 된다).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대본집의 도움을 받아보기로 했다. 새로운 시도다. 얼마나 유효할지는 개봉박두!


짐 홀트, ‘아인슈타인이 괴델과 함께 걸을 때’

내게 남은 지적 허영의 마지막 증적은 아직도 대중과학 서적을 사들인다는 것이다. 내 뇌는 실용적이고 일상적인 생활 외의 영역을 하루가 다르게 좁혀나간다. 더 이상 돌볼 여력이 없어져 점점 더 많은 비실용 구역을 절전모드로 전환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에 대한 저항으로 나는 가끔 과학서를 산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호기심과 갈망. 죽을 때까지 놓치고 싶지 않다.


매거진의 이전글#00 내가 산 책(또는 음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