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상이 낭비라고 생각했어도 미켈란젤로는 피에타나 다비드를 만들 수 있었을까? 음악이 소음이고 공해라고 생각했어도 모차르트는 작곡을 했을까? 나는 (많은) IT 개발이 공해나 낭비라고 자주 생각하는 IT업자다.
정확히 말하면, 내 고객들의 오해와 기술적인 무지가 낭비를 양산한다고 자주 생각한다. 유의미하고 꼭 필요한 개발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시간과 돈을 기꺼이 쓴대도 보나마나 한 미래의 쓰레기 개발을 요구받을 때, 나는 잠시 쓸쓸하고 외로워진다.
우선, 내가 낭비라고 생각하는 프로그램이 예상과 달리 의미 있는 기능을 할 거라고 스스로를 향해 말해본다. 무척 설득력 있다. 사용은 내 영역을 자주 넘어서고(나는 공급이나 생산 영역에만 있다), 기술은 필요와 요구를 따른다. 요구가 기술 진보를 이끈다. 이건 내가 주지하는 바다. 분명히 그렇긴 한데, 기술적으로만 검토하면 자원 낭비다. 아무리 생각해도 ROI가 안 나온다. 사람을 가르치면 될 일을 난개발로 막다니.. 가 한 예다. 내 돈으로 한다면 절대 안 할 개발인데, 라는 생각이 들면 괴로움과 내적 갈등이 고조되기 시작한다(아니, 그렇지만 이건 내돈 드는 일도 아닌데 대체 왜 괴로워야 하는 거지?).
다음 단계로, 세계가 유지되려면 낭비도 필요하다고주장해본다. 이건 산업이고, 돈이 돌아가는 일이고, 누군가 이 쓸모없는 일을 함으로써 돈을 받으며, 나 역시 그 돈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고 되물어본다. 완전히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기운은 안 난다.
그런 나를 향해, 의미를 찾는 함정에 걸리다니 나이브하다며 냉소를 지어보기도 한다. 죽어 없어지면 45억년 지구 역사에 먼지 한 톨로도 못 남을 주제에 의미라니 웃기는군, 이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역시 밥맛이다. 아무튼 한 톨의 먼지가 되기 전까지, 그러니까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내 세계는 의미로 가득하다.
영화 ‘매기스 플랜’의 주인공은 남편과의 관계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깨달으면서 그를 전부인과 재결합 시킬 계획을 세운다. 이 비범한 계획을 들은 친구는 대체 왜 평범한 이혼을 하지 못하냐고 질문하는데, 매기의 답은 “낭비잖아!”다.
그 낭비를 막으려 굳이 남편의 전부인을 찾아가 자기 계획과 그 근거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매기의 심정을 나는 내 것처럼 이해한다. 그 눈처럼 순수한 의도를 말이다(물론 전부인은 경을 친다). 정말이지 깔끔하고 낭비 없는 세계만을 생각하는 사람의 논리적 귀결이다. 나는 요즘 이런 쪽으로 확실히 기울어있다.
내가 납득할 수 없는 낭비를 지시하듯 요구하면서 나를 다만 개발량을 줄이고 싶어하는 개발자 보듯 할 때, 나를 한번 더 할퀴는 것은 IT업계 종사자를 향한 멸시다. 이런 혐의는 가뜩이나 이 직업에 애착이 없는 나를 심리적으로 녹다운 시킨다.
그리고 내 말이, 내 논거가 아무런 힘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매 순간(미래의 쓰레기를 개발하기로 결정이 내려지는 순간), 직업적 회의가 찾아온다. 나는 시드니 루맷 감독의 영화 ‘열두 명의 성난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이잖은가. 합리적인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의견을 교환하고 올바를 결정에 도달하는 것이다. 오직 말로써(물론 나는 ‘합리성의 비합리적 토대’라는 사회학의 금언을 아는 사람이다. ‘합리성’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경계해야 하는 제약을 안다는 뜻이다. 적어도 머리로는).
이걸 개발하는 건 너무 낭비잖아, 라며 고객이 떠난 책상 앞에 풀 죽어 앉아있는 나를 토닥이는 또 다른 나는 이런 말을 건넨다. 세상은 원래 낭비로 가득한 거라고. 비합리는 세계의 당당한 일원이며 제거할 수 없는 거라고. 오히려 합리는 비합리의 바다에 떠있는 빙하와 같은 거라고. 마흔이 되면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여유로울 수 있길 기대한다. 지금은, 아직은 소화불량이 인다, 이 낭비와 비합리의 세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