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내가 산 책 -22/01/22

고전주의 음악, 프로그래머의 뇌, 그리고 그보다 궁금한

by 만정

찰스 로젠, ‘고전적 양식’

풍월당은 내가 주기적으로 신간을 확인하는 출판사다. 본디 압구정에 위치한 클래식 전문 레코드점이었던 것 같은데, 클래식 관련 강연과 모임을 주최한다는 소식이 들렸고, 어느 샌가 내게 가장 중요한 음악 관련 출판사 중 하나로 자리매김해 있었다.


풍월당 출간 서적으로 처음 접한 알렉상드르 타로의 ‘이제 당신의 손을 보여줘요’를 워낙 좋아했다. 피아니스트 타로에겐 유감스럽지만 음악보다 에세이가 좋았다. 시작과 끝이 따로 없고, 구심력도 없이 단편적인 이야기를 누적할 뿐인 구성 없는 구성 같은데, 읽다보면 자연인이자 음악가로서의 타로에 대해 입체적인 상을 그리게 된다. 에세이가 이러기 쉽지 않은데, 좋은 책이었다.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음악에 대한 지식과 사랑을 전하는 그림책 ‘음악의 집’은 아직 내 책상 위에 진열되어 표지를 뽐내고 있다. 풍월당 책은 내용만이 아니라 만듦새가 좋아서 주문할 때 갈등이 덜하다.


‘고전적 양식’이라는 제목을 인터넷 서점에서 발견했을 때, 외국도서이며, 풍월당에서 출판됐다는 것을 확인하고 즉각 장바구니에 담았다. 융통성 없는 제목이 내 스타일이다(대학에서 내가 제일 좋아했던 과목 제목은 ‘지식 사회학’이었는데, 나중에 이름을 바꿨다. 책 먼지 날릴 것 같은 무뚝뚝한 제목을 세련되게 바꾼 게 난 영 못마땅했다). 작가 찰스 로젠은 처음 듣는 이름이지만, 불문학 전공자이면서 나중에는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다는 독특한 이력이 소개되어 있다.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이 책이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는 출판사 소개(고백)였다. 나는 말랑말랑하고 부드럽고 가벼운 책을 선호하지 않는다. 문장과 문장, 가능하면 단어와 단어가 진전을 이루거나 벽돌을 쌓아올리는 책에서 느끼는 쾌감이 크기 때문이다. 이런 책은 공들여 읽어야만 한다. 소개와 목차 구성으로 보건대, 대중에게 간신히 읽힐 정도의 논문 같은 인상이 강해서 신뢰가 갔다. 또, 책에서 다루는 질문은 보편적이면서도 지금껏 그럴 듯한 답을 들어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고전주의가 왜 서양음악의 황금기인지, 그 시기의 트로이카인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은 어떻게 서로 다른지와 같은 ‘고전적인’ 문제들 말이다. 나는 책에서는 이 문제들을 ‘논증’하지 않을까 기대감에 부풀었다. 나라도 할 수 있는 단순한 ‘썰’을 푸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논거를 들어 증명해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기대감 말이다. 책이 내 기대대로라면 나는 연초부터 잭팟을 터뜨리는 것이다. 게다가, 이 세 작곡가를 각각의 특징적인 장르로서 설명한다? 아… 이쯤되면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다.


하지만 장바구니에서 결제까지 가는 길에는 두 가지 장애물이 놓여있었으니. 먼저 출간연도가 1971년. 반 백년 전의 논문이라면 이미 후속 연구들에 의해서 의미가 감해지진 않았을까? 한 마디로, 한물 간 건 아닐까? 였으나, 한편으로 시간은 확실한 검증자다. 한물 가지 않았다면 고전일 수도 있다. 둘째는 번역. 음악 이론에 능통하지 않은 나로서는, 번역이 잘못됐다면 못 읽거나 불쾌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역시 읽기 전엔 알 도리가 없다. 그렇다면 도전!


펠리너 헤르만스, ‘프로그래머의 뇌’

뼛속 뿐 아니라 DNA까지 문과인 내가 프로그래머들과 함께(또는 프로그래머로서) 일하기까지 지난한 세월이 있었다. 아직도 입사 첫 기술 교육에서 맛봤던 혹독한 실패와 좌절이 잊히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제일 못하는 일이 분명했다.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 뇌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11년 째 일하고 있다고 해서 내가 자신있는 프로그래머로 거듭난 건 아니다. 다만 코드를 좀 읽었고(생존이 달린 문제였지만 내 독해력은 형편 없었다), 오류와 장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작은 수정에도 강박적인 테스트를 해댔으며(완전히 낭비였던 테스트를 수도 없이 했다. 그래도 오류가 있었고, 장애도 내봤다), 설계자 또는 컨설턴트라는 낯 부끄러운 직함으로 일할 때에는 개발자들에게 부탁하며 전전긍긍했다. 지금은 그간의 경험이라는 목발을 짚고 내 머릿 속의 논리회로와 감, 센스로 연명하고 있으니, 엔지니어로서의 내 미래가 그다지 밝을 것 같지도 않다. 아, 오욕의 세월이여.


그래도 어느 새, 기술적인 의사소통을 해내고 있는 나 스스로를 보고 놀랄 때가 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나도 0과 1로 사고하는 프로그래머나 컴퓨터를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다고 자각하기도 한다.


이 책의 부제 ‘훌륭한 프로그래머가 알아야 할 인지과학의 모든 것’은 두 가지 포인트로 나를 저격한다. 먼저 나는 스스로 ‘훌륭한 프로그래머’가 되거나, 훌륭한 프로그래머들과 일하고 싶다. 나로서는 온몸으로 부딪히고 깨지면서 습득한 것을 효과적으로 습득하는 무려 ‘과학적으로 입증된’ 방법을 제시한다는 마케팅 문구가 나를 자극했다. 나는 아직도 더 효율적인 프로그래밍에 목마르다(그것이 곧 칼퇴의 길이다). 이런 실용서로서 뿐 아니라 내 동료의 뇌가 돌아가는 방식을 알고 싶은 호기심과 욕망을 ‘인지과학적으로’ 충족하게 한다면 분명 살 가치가 있는 책이다. 머리를 열어볼 수도 없고, 물리적으로 연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닌데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대를 이해하려는 사치스러운 욕구를 ‘인지과학’보다 더 잘 파고드는 어휘가 지금 여기 존재하기나 할까?


하지만 책이 손에 도착하면 내가 가장 먼저 할 일은 표지를 뜯어보는 일이 될 것이다. 휴대폰으로만 봐서 그런건지, 표지 그림이 뜻하는 바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빨간책방의 표지 평론가 김중혁 선생이 이 표지를 봤다면 무어라 했을까?). 종합하자면, 표지부터 내용까지 재미있지 않을까 기대가 만발이다.


레이첼 리처즈, ‘나는 짧게 일하고 길게 번다’

훌륭한 프로그래머가 되는 것보다 더 간절한 소망은 더 이상 프로그래머로 일하지 않는 것이다. 이 책을 산다는 것이 자존심 상하고 치욕적이지만, 주식이나 부동산 말고도 나 대신 돈을 벌어줄 잔잔한 시스템을 구체적으로 알려준다는데, 한번 들어나보기로 했다. 아니면 두꺼비한테 시집 보내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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