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내가 산 책 - 22/03/10

인간이란 무얼까 생각하게 되는 날

by 만정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에서 연인을 떠나보낸 엘리오(티모시 살라메 역)가 실연의 통증을 느끼는 장면을 떠올린다. 어제처럼 빛나는 여름 태양은 이제 그의 머릿 속처럼 어지럽다.


“5년마다 돌아오는 이 무서운, 징그러운“ 행사 다음 날, 여전히 해는 떠오르고 아침은 밝고 일상을 멈출 수 없는 나는 엘리오 아버지의 위로와 조언을 붙들고 기를 쓴다.


(고통을) 느끼지 않기 위해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면 그건 얼마나 낭비니? 지금 이 고통도 그대로 느껴. 네가 느꼈던 기쁨처럼.


내 곁을 스치는 타인에 대한 불신과 실망으로 가득한 아침, 시니컬해지지 않기 위해, 길게 보고 멀리 보기 위해 나는 무엇보다 책을 산다.


‘엔드 오브 타임’은 유발 하라리가 ‘호모 사피엔스’로서 던진 충격을 좀 더 거대한 맥락 속에서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차원으로 넓히지 않았을까 예상한다. 멀리서 보고 싶다. 우주에 단 하나뿐인 형식의 원자 결합 형태로 백년 안팎을 존재하다 다시 흩어져 우주로 돌아갈 인간, 나라는 의식의 물질을 생각하면서 스스로에게 위안과 평온이 깃들길 기대한다.


돌아보니 이 이벤트가 내게는 긴 시간 진행형이었다. 반년은 너끈히 이 일에 주의를 기울였다. 최근에는 실질적인 공포와 억울함에 적잖이 짓눌려 있었던 것도 같다. 우주의 시간 말고 인간의 시간도 살펴보고 싶다. 꽤 훌륭한 일과 그를 상쇄하고도 남을 바보 짓의 진자운동을 반복해 온 인간사의 가장 최근 백년 사와 그 속의 인간을 봐야겠다. (적어도 지금,) 여기서 세상 끝나지 않는다는 확신이라도 갖기 위해 크게 한 숨 들이마시고 세계와 인간사를 봐야겠다. 나보다 좀 먼저, 더 오래 세계를 겪은 믿을 만한 인간의 이야기에 귀기울일 것이다. 내 옆의 인간에 대한 불신과 그들에 대한 온전한 실망을 흐트리기 위해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집어든다.


좀처럼 시를 읽지 않는데, 더구나 문태준 시인이라면 아직 우리 집에 들인 적이 없는데. 속이 너무 쓰려서 위벽 보호제 같은 시집을 슬쩍 얹어본다. ‘아침은 생각한다’. 우리 언어의 최첨단을 만끽하고 싶다. 그저 즐거움을 위해. 이 책이 목적에 부합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이제, 영욕의 쉼표에서 스칼렛 오하라가 했던 말을 촌스럽게 되뇌어본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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