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렌치 디스패치>

by 만정
나의 경애하는

프렌치 디스패치. 웨스 앤더슨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와 사랑스러운 영화 타이틀을 단숨에 빼앗은 최신작(이전까지는 각각 '로얄 테넌바움'과 '문라이즈 킹덤'이었다). '가장 잘 만든 영화' 타이틀까지 넘기길 주저하는 것은(지금까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다) 오로지 프렌치 디스패치에 완전히 내 마음을 빼앗겨버렸기 때문이다.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의 모든 장면과 그 장면 속 미술을 사랑하게 되었다. 영화 속 세계를 세심하고 (강박적으로) 완벽하게 구축하는 것은 웨스 앤더슨의 장기이다(그리고 영화가 그런 매체가 아니었다면 웨스 앤더슨이 영화를 했을지 의문이다). 그의 장기는 이 영화 속에서 더 숙련되고 더욱 촘촘하게 발휘된 듯 하다.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야기가 압권이다. 영화와 문학의 관계는 내게 아직 수수께끼이다. 문학작품의 영화화, 또는 문학적 영화가 영화로서 갖는 의미에 대해 나는 아직 답을 마련하지 못했다. 물론 (대중)영화는 이야기를 뼈대로 하는 경우가 많지만, 시각과 시간의 매체에서 이야기가 압도할 때, 그것이 영화적으로 올바른 것인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이 영화는, 말하자면 후자에 속한다. 영화 전체가 한 잡지의 폐간호이지 않은가. 웨스 앤더슨이 영화에 문학과 책을 끌어들이는 것 역시 처음은 아니다(로얄 테넌바움과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있었다). 하지만 잡지 한 호를 영화로 구성하는 것은 형식적으로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2 페이지짜리 지역 소식으로 시작해 메인 스토리 세 개(예술과 예술가, 정치/시, 맛과 냄새)가 이어지고, 부고란과 함께 끝난다, 잡지도, 편집자도, 편집자와 기자들의 이야기도.


영화는 이 모든 것이다. 각 기사는 자신의 분량과 주제, 분위기에 부합하는 프레젠테이션 형식을 갖추고 있다. 모든 '기사(혹은 옴니버스 형식의 다섯 개 단편 영화)'는 활자화 된 기사의 나레이션이며 영화적으로 연출된 기사story다. 동시에, 영화화 된 기사에는 기사를 둘러싼 이야기story가 묻어있다. 이제 각 섹션은 기사가 쓰이는 과정이고, 기사를 쓰는 기자의 이야기이며, 그 이야기를 쓴 기자와 편집자의 이야기이다. 기자와 편집자의 관계가 드러날 즈음, 영화 관객인 나는 어쩐지 프렌치 디스패치의 오랜 구독자로서, 이 잡지의 역사를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활자로서의 문학이 110분 안에 전달할 수 있는 이상의 정보량이다. 보통 문학이 영화화 될 때, 영화가 전할 수 있는 정보량이 책에 비할 수 없어 발생하는 제약이 있는데, 문학적으로 꾸며낸 이 영화 속에서 영화는 문학을 찬양하는 동시에 문학을 넘어선다(어떤 면에서). 이 모든 요소는 기기묘묘하고 아크로바틱하게 각 기사/영화를 이룬다(그래서 웨이터가 음료잔을 준비하는 첫 신이 그토록 현란하고 인상적이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형식과 내용이 일치한다면 내 해석이 과장만은 아닐 것이다).


다섯 기사는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좋다. 특히 첫 메인 스토리는 흡인력이 대단하다. 틸다 스윈튼이 화자(기자)로 등장하는 “예술과 예술가” 섹션으로, 클림트 그림 속 여성들의 머리칼 같은 주황색을 이야기만큼 오래 곱씹게 된다.


그렇지만 하나의 이야기를 꼽으라면 프랜시스 맥도멘드가 연기하는 크레멘츠라는 기자가 쓴 “정치/시” 섹션이다(지금으로서는). 정치와 시가 어떻게 슬래시로 이어진 한 개 섹션이 될 수 있는지 나처럼 의문을 품는 사람이라면, 마찬가지로 나와 같이 영화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다운 순수함과 열정, 기쁨과 낭만의 노란색은 다음 주에도 내 마음 속을 맴돌 것이다.


한편, 이 섹션의 주요 인물 제피렐리(티모시 살라메가 연기한다)는 사랑받지 않기 어려운 인물인데, 그 이름에서 자꾸만 이탈리아 영화감독 프랑코 제피렐리를 연상하게 된다. 2019년 6월 15일, 제피렐리 감독의 부고를 나는 베네치아의 에어비앤비 숙소 티비에서 들었다. 향년 96세 였던가? 티모시의 제피렐리가 요절하는 젊은 투사로 등장하는 건 이 영화인에 대한 농담일까?


영화도 잡지도 끝나지만 그 순간까지 이야기는 멈추지 않는다(편집자 부고 초고가 쓰여지는 모습을 보았으면 한다). 마지막 기사/이야기 이후에도 이야기는 (어쨌든) 계속 될 것이라는 암시로 받아들인 나는 안도했다. 이야기는 한 인간의 생물학적 삶을 넘어서는 삶을 살고, 그보다 더 멀리 이어진다. 이야기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이들은 그의 사람들이었다


"발행인란 줄이고, 광고 자르고, 주임한테 인쇄지 더 사라고 해.
난 아무도 안 죽여(I'm not killing anybody)."


웨스 앤더슨의 영화 속 세계에서는 누군가 죽고, 원치 않는 이별을 하고, 사랑을 이루지 못하며 그렇게 한 시기가 끝난다. 자주 서글프고 잘 생각해보면 축축한 슬픔이 엄습해오는 웨스 앤더슨 특유의 정서가 이번이라고 바뀔 리 없다. 나는 이 쿨하지 못함에 늘 마음을 빼앗긴다.


'프렌치 디스패치' 역시 각 기사/이야기마다 자기 몫의 짠함과 슬픔, 서러움을 발산하지만, 이번 만큼은 이 어지러운 감정들이 아닌 따뜻하고 굳건한 정서가 나를 사로잡았다. 그 정서는 자기의 기자들을 아끼고 격렬하게 보호하는 편집장이라는 안전한 세계에서 비롯된다. 좋은 필진을 알아보는 눈을 가지고 그들을 인간으로서 이해하며 글과 인간을 끝내 지지하고 사랑하는 이상적인 공동체 말이다.


영화 '함께 할 수 있다면'에서 느꼈던 함께 함의 힘이 전혀 다른 드라마와 문법으로 쓰인 것 같은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혹은 영화 '헤일 시저'에서 "천국을 지키느라 과로하는 관리인(김혜리 기자의 말을 땄다)"인 캐피틀 픽처스의 에디 매닉스가 잡지사 편집장으로 다시 나타난 것 같기도 하다. 두 작품 모두에서 역설하는 영화/잡지와 그것을 이루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오랫동안 내 손발을 뜨끈하게 한다. 아, 이렇게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한 시기를 함께 할 수만 있다면. 그밖에 무엇이 또 있기나 할까? 연휴 끝에 영점조준 된 나는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온다. 함께 할 수 있다면, 이라는 원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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