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이 라이브만 같았으면
그해 내 룸메이트는 서울대 음대생이었다. 음대생 룸메이트를 두다니. 지역 기숙사의 혜택이었다. 예체능 계열 전공 없이 단출한 우리학교 기숙사에 살았다면 없을 일이었다. 국문과나 철학과, 기껏해야 전자과 친구와 한 침대를 썼겠지. 키가 크고 보조개가 예쁘고 스타일이 좋은 친구였다. 다만 얘기 나눌 기회는 적었다. 수업시간 외엔 기숙사에만 있다시피 했던 나와 달리 이 친구, 아침 일찍 나가면 내가 잠든 후에야 귀가 했다. 바쁘고 성실하고 구김살 없고 예의 바른 인상이 마음에 남아있다.
사람에 대한 인상보다 더 오래 남은 건 이 친구가 갖고 있던 음반들이다. 카운트 베이시 Count Basie Big Band 의 77년 몽트뢰 라이브 ‘77 Montreux Live, 빌 에반스 트리오 Bill Evans Trio 의 Waltz for Debby, 아마도 탱고였을거라는 추측만 가능한 개리 버튼Gary Burton의 씨디. 어느 오후나 주말 낮에 나는 남의 씨디를 틀어놓고 혼자 방을 뒹굴곤 했을 것이다. 내 얄팍한 재즈 취향의 5할은 이때 형성됐다. 빅 밴드에 대한 선호를 깨달은 것도 이 시기. 그 친구는 클래식 전공자인데 이런 음반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타악기 전공자였던 때문일까? 아니 아마 음악적 취향이겠지? 이제는 확인할 길이 없다.
개리 버튼은 가끔 생각하고 빌 에반스는 왈츠 포 데비 대신 포트레이트 Portrait in Jazz 음반을 갖고 있다(Someday My Prince Will Come 을 사랑하지만 앨범 전체로는 왈츠 포 데비가 더 좋다. 이 생각을 매번 하는데 그럴 때 마다 뭔가 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왠지 분하다).
하지만 나는 카운트 베이시의 몽트뢰 77년 라이브 앨범을 보유하고 있고, 그 사실을 떠올리면 예외 없이 우쭐해진다. 이제는 유튜브 뮤직으로 들을 수 있지만 우쭐한 마음은 줄지 않는다.
이 앨범 전체는 내가 생각하는 인생의 행복감을 함축한다. 날이 제법 따뜻해지고 일몰이 늦어져 어스름한 저녁이 길어지는 계절, 반팔 면 티셔츠나 원피스를 입고서도 추위의 감각 없이 야외에 앉아 유리잔에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를 낼 때 이 연주가 시작되는 것이다. 잘 연주되기 때문에 곡 자체에 긴장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주된 분위기는 여유다. 연주자들도 모두 적당히 흥이 나있고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여유가 넘친다. 퇴근길도 아니고 내일 출근 생각 같은 것도 없는 저녁이다. 파랗게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하늘은 어쩐지 브라스 음색처럼 반짝여서 시각적 어둠마저 물리치는 듯 하다. 지금 내가 해야할 것은 오직 이 여유를 만끽하는 것 뿐이다. 아, 인생. 이런 거 아닌가.
이 음반이 생각난다는 건 어느 새 낮이 길어지고 있다는 뜻. 이 계절이, 이 계절이 이 음반을 상기시키는 게 좋다. 십수년 동안 반가움은 줄지 않는다. 올해 다른 점이 있다면 빌 에반스와 개리 버튼, 그리고 그 앨범의 소유자인 룸메이트 생각이 난다는 것. 이 음악들을 알려준 그에게 새삼 고마움이 샘솟는다. 어딘가에서 여전히 보조개를 뽐내며 씩씩하고 기운넘치게 지내고 있길. 가만히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