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 10: 오픈
IT 프로젝트는 오픈을 향해 나아간다. 프로젝트 계획과 일정, WBS의 정점은 오픈(Go-Live 라고도 한다)이다. 통상 오픈 후 안정화 기간을 잡고 프로젝트를 종결하지만(끝없는 프로젝트가 있을까? 아닐 것이다. 프로젝트가 끝나야 비로소 끝없는 유지보수가 시작된다) 프로젝트의 목표로 삼은 To-Be가 운영 서버에 반영되고 실사용자들이 사용을 시작하는 오픈이 사실상 골인점인 셈이다.
지난 주 수요일,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오픈했다. 나는 모든 임직원을 사용자로 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의 일부를 맡고 있었다. 내가 관리하던 프로젝트는 주요 프로세스는 아니었다. 팀장 이상 직책자와 현업 인사담당자만 사용하기 때문에 사용자가 매우 한정되어 있고, 그 사용자가 트랜잭션(말하자면, 어떤 시스템에서나 마주할 저장이라든가 승인, 결제 버튼처럼 데이터 변경과 후행 프로세스를 일으키는 것이다)을 일으키는 일이 없는 레포트(그렇다. 요즘 핫하다는 BI 프로젝트였다) 위주의 시스템이었다. 오픈 치고는 위험부담이 매우 적다는 뜻이다. 오픈 시 확인할 포인트가 단순하고 혹시라도 발생할 장애 상황의 영향도도 적으며 대처방안도 단순하다고 판단했다.
예상보다도 평탄한 오픈이었다. 7-8월 양양 바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잔잔한 파도를 서퍼들은 장판이라고 부르는데(파도를 기다리는 서퍼들에게는 기운 빠지는 소식이다) 종일 장판이 떠올랐다. 지루할 정도로 별일 없는 오픈 날이었다. 오픈 후 모니터링과 일부 개선 작업이 당분간 후행하게 되겠지만 이미 문제점이 밝혀진 상태이므로 적어도 장애로 이어지지 않도록 조치/대응할 수 있다. 늘 그렇듯 작업 방향과 계획을 수립하면 끝날 일이다. 감사할 일이다.
나는 이 프로젝트가 내 인생 마지막 IT 프로젝트라고 생각하며 이 시리즈를 시작했다. 지리한 이 오픈을 기다리며(이미 중대한 여러 의사결정들은 끝낸 상태였고 나머지는 실질적인 작업 뿐이었는데 작업자와 카운트 파트너 사이의 관계가 이미 정해진 후였기 때문에 사실상 내가 없다고 구멍이 날 상태는 아니었다. 나는 진행 중 이슈와 일정에 따른 결과물만 챙기면 되었다. 내 판단은 별로 틀리지 않았다) 두 달을 보냈다.
다가올 앞날을 생각하다가도 사무실에 앉아있으면 화가 나고 억울했다. 일을 하다보면 있을 법한 일이다. 갑을병이 나란히 일하다보면 여러 갈등이 발생하니까. 그리고 이번에 만난 갑과 병은 이례적인 편이었으니까. 자기가 모르는 것은 곧 없는 것이라 생각하는 무례, 그러니까 상대의 일에 대한 리스펙트가 없는 경우와 의사소통을 일방적으로 단절하는 방식으로 업무 파트너를 업무에서 배제하는 황당한 경우를 동시에 경험하는 좋은 기회였다.
어제 상담에서 이 상황을 설명했다. 내 의사는 환자에게 매우 위안을 주는 공감의 표시를 해주었다. 전날도 꿈에 병을 만났다고 말하자 같이 안타까워해주는 의사를 만난다면 제법 운이 좋은 편이지 않겠는가.
다만, 나는 내가 이 모든 기이한 사람들에도 불구하고 이 일에서 끝까지 살아남았어야 하는데 결국 실패한 것 같다는 목소리가 마음 속에 간간히 울려퍼진다고 고백했다. 선생님은 매우 간단하게 답했다. 우리가 늘 fight 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항상 회피와 도피를 하면 안되겠지만 어떤 게임에서는 flight 할 수도 있는 거라고. 퇴사 대신 휴직 후 다른 팀으로 옮기는 안을 선택한 게 그래서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만약에 이런 일로, 겨우 날 성가시게 하는 타인을 이유로 회사를 그만뒀더라면 나중에 정말 졌다는 생각을 했을 거라고.
물론 내가 이 일을 접으려는 건 단순히 그 사건이나 사람 때문은 아니었다. IT 업계 일에 관해 나는 약간 발기부전 환자 같은 느낌이고 이렇게 재미없게 남은 평생을 살 수는 없다는 다른 불안을 해소해버리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렇다해도 나라는 자는 지금 퇴사했다면 나는 나를 패배자로 괴롭힐 종류의 인간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지 않기로 한 건 근사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시행착오. Trial & Error. 아직 내가 시도해볼 수 있는 실패는 줄을 서있다. 대여섯 번의 실패를 이 회사에서 반복 하다보면 나는 어느 덧 은퇴할 나이에 접어들 것이다.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매번 복기한다면 완전한 실패만은 아닐 거라고, 우리는 그것을 경험이라고 말한다고, 주말의 나는 생각한다(현장에 나가면 제정신이 아닌 날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붙이는 전제다). 모든 실패의 카드를 쓰기 전에 내게 흥미로운 일을 만나거나 내가 옳고 더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일로 전직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오늘 내 브런치 홈에는 25년 IT 업계 종사자가 쓴 글이 소개되었다. 개발자에 이어 외국계 회사의 프리세일즈 업무를 오래 해오신 듯한 이 분의 이야기가 나를 돌아보게도, 안심시키기도 한다. IT 업계 사람들은 매우 개인주의적인 편이다. 자기 고충을 나눌 상대는 생각보다 많지 않은데, 이 분과 일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같이 이야기 나누고 싶은 마음이 동했다. 더구나 마지막 글이 퇴사이고, 아직도 이 퇴사에 대해 화가 난다고 하는 문장을 보니 지금의 나로 생각이 이어졌다. 또다른 내 동료는 말했다. 억울함은 그렇게 빨리 사라지지 않는다고. 이번 억울함은 좀 더 지혜롭게 다뤄봐야겠다고, 주말의 나는 가볍게 다짐해본다.
아직 40개의 단어가 남아있고 정해진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