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 공항은 처음이다. 스키폴 공항 환승 시에는 ’Transfer’ 표지판만 잘 따라가면 된다는 블로그 글을 떠올리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 애쓴다.
보안검색대에서 시간을 지체했지만 그래 봐야 10분이었을 것이다. 면세점은 아직 한가했다. 이른 아침이니까. 에스프레소를 한잔 마시고 싶은데 커피메이커만 눈에 띄었다. 네덜란드는 커피메이커 문화인가? 그렇다고 스타벅스 가긴 싫은데. 몇 시간 후면 이탈리아에 있을 테니 에스프레소는 거기서 마시기로 한다.
그때 튤립 구근 판매점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튤립을 좋아하던 사수 생각이 났다. 네덜란드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한 적 있는 책임님이었다. 검역이 마음에 걸리지만, 식물을 좋아하는 엄마에게 혹시 구근을 좀 살지 물었다. 현명한 어머니는 구근도 씨앗도 지나쳤다. 튤립을 별로 안 좋아하시는 건가.
엄마는 튤립보다 누가를 궁금해했다. 엄마는 호기심이 많다. 그 호기심은 자주 나와 다른 대상을 향한다. 의견과 취향이 달라도 엄마와 여행하는 게 즐거운 이유다. 피스타치오 누가를 하나 사서 나눠먹었다. 끈적한 누가를 엄마가 손으로 떼 내 입에 넣어줬다. 내 손은 끈끈해지지 않았다. 누가에서 단맛이 났다.
암스테르담 공항 면세점에는 큰 서점이 있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비행기 탈 때 당연하다는 듯 책을 들고 타는 걸까? 영어와 알 수 없는 언어로 진열된 분야별 책, 잡지들을 차근차근 둘러보았다. 에르메스가 뭐냐고 묻는 엄마와 그것도 모르냐고 말하면서도 명품가방 같은 건 절대 사지 않는 나의 면세점 구경이란 이런 것이다. 튤립과 누가, 서점.
어쩐지 입국심사대가 없다 했더니 면세점 다음 코스였다. 늦을 일은 없지만 직원이 두 명만 있어 대기줄이 있다. 엄마에게는 비행기에서부터 스트레스를 주고 있었다.
나: 입국심사하는 사람이 왜 왔냐고 하면 뭐라고 대답할 거야?
엄마: …여행한다고 하지 뭐.
나: 여긴 경유지니까 비행기 갈아타고 이탈리아 여행 간다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이태리 어디 가냐고 물으면?
엄마: 로마, 나폴리.
나: 베네치아랑 피렌체, 밀라노도 가잖아(약간 짜증). 다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얼마 동안 여행하냐고 물으면?
엄마: … 2주?
입국심사를 기다리는 동안 같은 문답을 한번 더 반복했다. 내가 엄마라면 딸이라도 내가 싫을 것 같다.
나: 누가 먼저 들어가는 게 좋을까?
엄마: 너(명쾌, 단호).
내 예상 질문을 받은 건 나였다. 코미디인가. 다행인가. 대답하고 나오니 엄마는 더 금방 통과한다.
나: 뭐 물어봐?
엄마: 왜 왔냐고 해서 베네치아 간다 그랬어. 그리고 바로 도장 찍어주던데?
나: -_-
게이트 앞에서 베네치아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쉽지 않았다. 한 시간 남짓이었을 텐데 피곤과 졸음 때문에 길게 느껴진 것 같다. 지금껏 엄마에게 괜찮냐고 여러 번 물었는데, 대답처럼 정말 괜찮아 보였다. … 내가 엄마와 자유여행할 수 있는 이유다. 올해로 64세. 엄마는 열세 시간 비행 끝에도 괜찮을 수 있는 체력의 소유자다. 지치는 역할은 내 것이다. 우리 가족에겐 놀라운 일도 아니다. 졸음과 피곤 속에서 나는 혼자 20일 앞으로 다가온 휴직종료일에 쫓기고 있었다. 엄마 말처럼 엉성해 보이는 공항은 천장이 유난히 낮은 느낌이다. 나는 빠져나올 방도가 없는 유리 락앤락에 갇힌 기분이 들어 혼자 조용히 진땀을 흘린다. 옆에는 엄마가 있는데도.
시티호퍼라는 귀여운 이름에 걸맞은 작은 비행기를 탔다. 수요일 이른 아침 베네치아에 갈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비몽사몽 기내식을 먹는다. 호밀빵에 치즈라니. 신뢰가 가는 맛이다. 창 밖으로 눈 덮인 산맥이 나타났다. 알프스일 것이다. 이탈리아 북쪽 국경을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다. TV로 보던 것보다 더 험준하고 넓은 지역에 걸쳐있었다. 이제 설렌다. 곧 여행을 시작한다는 긴장감(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하고, 내가 모르는 언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영어로 소통해야 하며, 하루에도 수십 번 길을 잃게 될 거라는. 그리고 이밖에 생각지도 않은 일이 얼마든 일어날 수 있다는)을 압도하는 감정이다. 이 광경 때문에 다시 이 경로로 여행할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이나 엄마 너머로 알프스를 내다봤다.
베네치아 공항을 빠져나오는 일은 빠르고 간단했다. 쇵겐조약을 맺은 첫 입국지 암스테르담에서 이미 입국심사를 끝냈기 때문에 더 그랬을 것이다. 수상버스 티켓을 사면서 선착장 가는 길을 물어보고 길을 나선다. 이제 캐리어를 끌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