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로베니 예배당 예약에는 세 가지 옵션이 있다. 예배당만 보기, 예배당과 박물관 보기, 야간 개장. 박물관이 닫는 월요일이 아니면 예배당만 보는 예매는 할 수 없다. 박물관에 관심이 없었지만 내가 베네치아에 머무는 기간은 수요일부터 일요일 오전. 박물관을 포함한 예약만 가능했다.
좋은 그림/조각에 둘러싸여 시간을 보내면 정신 뿐 아니라 온몸이 말갛게 씻긴 기분이 든다. 예술적인 샤워랄까. 이 기분 때문에 그렇게까지 탐욕적으로 미술관을 찾는 것 같다. 이탈리아에 거듭 오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이것임에 분명하다. 훌륭한 미술관/성당이 밀집한 곳이니까.
예배당에서의 예술적 샤워에 흠뻑 젖어 아직 얼떨떨한 상태로 박물관에 들어섰다. 박물관은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과 17세기 한 개인이 수집한 방대한 그림을 소장하고 있었다. 규모가 크고 소장품이 많은 편이라 대충 돌아보는 데에도 1시간 반 쯤 걸렸다. 일부 전시실에는 고대 유물과 현대 작가 작품이 함께 전시되어 흥미로웠다. 분명 그랬는데, 지금 돌아보니 신기할 정도로 기억나는 게 없다(심지어 사진도 없다). 목적 없는 관람이란 내게 이런 것이다.
이때쯤에는 에너지가 상당히 떨어졌다. 엄마 말고 내가. 이번 여행의 건강관리 담당자 엄마는 중간중간 사탕과 젤리를 공급해주었다. 엄마는 확실히 내 보호자로서 여행을 왔나보다. 심지어 지난 두 번의 여행보다 더 각별히 신경쓰고 있었다. 늙어가는 딸을 본인보다 더 걱정하는 양반이다(물론 합리적인 근거는 있다...).
관내 카페에 가서 스낵과 카푸치노를 시키고 자리에 앉는다. 엄마는 벽에 걸린 특이한 액자를 눈여겨보고 있다. 이국적인 텍스타일 조각으로 만든 근사한 벽걸이다. 조토고 박물관이고, 지금까지 파도바에서 본 것 중 제일 마음에 들어하시는 것 같다.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시는 걸 보면 확실하다.
엄마랑 같은 배경으로 서로 사진을 찍어주곤 하는데 늘 미안하다. 내가 찍고도 만족스러운 사진이 드물어서다. 엄마는 나를 늘 근사하게 찍어주는데. 다음 여행 전에는 기필코 사진 연습을 하리라(이번 여행 전에도 다짐하긴 했었다).
오래 기다린 끝에 받은 카푸치노는 카푸치노라기보다는 라떼 같았다. 사장님이 너무 바빠보였다. 뭐, 개의치 않는다. 곧 또 마실거니까.
스크로베니 예배당 마지막 코스로 뮤지엄 숍을 꼼꼼히 살폈다. 잔뜩 살 결심을 했는데 살 게 없다. 이렇게 좋은 소재가 있는데 이렇게 살 게 없다니. 안타깝다. 관련 책자가 제일 그럴 듯 해보였지만 읽을 것 같지 않다. 시간을 들인 면밀한 검토 끝에 엽서 두 장을 고른다. 유다가 예수에게 키스하는 배신 장면을 원했는데 그건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파란 배경에 천사가 있는 천가방도 하나 집어든다.
목적은 스크로베니 예배당 뿐이었지만 들른 김에 이날 하루 파도바를 둘러볼 생각이었다. 계획은 느슨했다. 공원과 식물원, 대학교, 페드로치 카페(민트초코로 유명하다고 한다) 정도의 키워드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3시 반, 베네치아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기 전까지 어슬렁거리며 도시를 느낄 것이다.
여행 와서 엄마와 길을 걷다보면 “저건 뭐니?” 또는 “저것 좀 보고 가자. 궁금해” 하실 때가 (자주) 있다. 옷, 스카프, 구두, 운동화, 악세서리, 멋진 디스플레이 등등 앞에 잠시 같이 멈춰선다. 대개 엄마와 함께 하지 않았다면 지나칠 곳이다. 궁금하지 않아도 엄마가 바라보는 것을 보고 같이 궁금해하고 의견을 나눴다. 매순간 진심을 다했다. 고백하자면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첫 여행에서 엄마는 로마 코르소 거리의 화장품점과 악세서리 가게를 즐기고 있었다. 지금보다 4년 정도 젊은 에너지로. 돌이켜보면 특별히 과도할 것도 없었다(당시엔 과도하다고 생각했다). 그땐 모든 게 새로웠으니까. 여정 중반 쯤인가, 엄마가 화장품점 키코 앞에 또 멈춰섰을 때 나는 그만 울어버렸다. 그 번잡한 쇼핑거리 코르소 한 가운데에서. 내가 하고 싶은 여행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이런’ 화장품점에서 시간을 ’낭비’하기에는 아직 탐색해야 할 로마가 너무 넓은데. 라는 마음이었다. 이 와중에도 엄마는 미안하다며 나를 달랬을 것이다. 곧 엄마에게 미안해졌고 미안한 마음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이걸 쓰는 지금도 부끄럽다.
과거의 부끄러움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결과적으로 성공이든 아니든) 다른 취향을 가진 여행 동반자로서 엄마의 여행을 이제라도 존중하려고 말이다. 말은 거창하지만 엄마에게 짜증내지 않기. 이 작고 소박한 목표를 마음에 품고 한국을 떠나온 건 확실하다. 까불지 말자. 365일 중 단 15일만이라도.
파도바의 패션은 뭐랄까, 학구적이다. 내 머릿속에 온통 대학 뿐이라 그런걸까? 얼마 전 조승연 씨 유튜브에서 이탈리아의 옷차림은 (파리에 비해) 번쩍거린다는 표현을 듣고 무릎을 쳤다. 로마를 떠올리면 맞은 말 같았다. 그에 비해 파도바에서는 지적인 자켓과 코트, 바지 정장이 눈에 띈다. 물론 이곳 패션도 화려하다. 하지만 그 방식은 시원하고 단호한 정장의 라인, 그리고 과감한 단색이라고 생각했다. 예배당을 나와 건물 1층 상가를 따라 걸으며 다시 한번 생각했다. 과감하고 지적인 비싼 옷들이다.
그때 서점이 눈에 들어왔다. 예쁜 그림책들이 유리창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홀린 듯 가게 정면으로 가보니 점입가경이다. 아담한 서점 전체가 예쁘다! 들어가서 내눈을 단박에 사로잡은 그림책을 보여달라고 했다. 이태리어를 전혀 모르지만 알 게 뭐람. “마음에 들면 사”. 엄마의 부추김에 힘입어 사기로 한다. 다른 그림책들을 들춰보는 사이 주인 양반이 다가와 책 한 권을 권한다. 이탈리아어로만 말해서 전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아름다운 책이라는 것 같았다. 아! 곧 아름다움을 납득했다. 고민했지만 결국 결정했다. 너도 같이 가자. 신나게 결제하고 돌아서려는데 엄마가 손자(즉, 내 조카) 선물을 골랐다며 나를 이끌었다. 매우 확신에 찬 목소리로 기억한다. 예쁜 트리 모양의 어드벤트 캘린더였다. 그렇게 30*50*0.5 센티의 조카 선물이 여행 이틀째 우리 여정에 합류했다.
점심으로 엄마는 피자, 나는 봉골레를 먹었던가? 규모가 크고 인테리어가 현대적인 리스토란테였다. 웨이터가 메뉴판 대신 QR코드가 적힌 종이를 내놔서 깜짝 놀랐다. 포크, 나이프, 냅킨이 우리나라처럼 종이 봉투에 들어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낯선 모습이다. 식사가 끝나고 계산을 하려 손을 들자 계산대에 가서 하면 된다고 안내한다. 낯선 서비스다. 너무 편리하고 지나치게 현대적이다. 파도바가 그런 도시인걸까? 코로나가 촉진한 변화일까?
식사 중에도 멋쟁이들을 많이 봤다. 이 나라는 특히 어르신들이 멋쟁이라 좋다. 잘 차려입은 옷과 정성 들인 매무새에서도 연륜이 느껴진다. 엄마는 내가 등지고 앉은 자리에 홀로 온 여자 손님이 아주 멋을 부렸다고 일러주었다. 우리가 마주친 여러 멋쟁이 중 한명이었다.
파도바 대학은 올해로 800주년이라는 플랑을 보고서야 그 건물이 학교인 줄 알았다. 저게 정말 대학인가? 우리나라 같은 캠퍼스 모습이 아니다. 학교 부지가 있고 그 안에 잔디밭이 있는. 밖에서 보기에는 그게 수도원이나 주택, 상업시설 중 뭐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주변 다른 건물들처럼 그저 오래된 건물이었다. 거기 속해있는 학생들이 부러워졌다. 나는 영원히 대학생을 부러워해야 하는 걸까?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 영원히 나의 대학시절에 머물고 싶은 거라고.
파도바 대학은 입장료를 내고 관람할 방법이 있는 것 같다. 다음에 혼자 온다면 들어가볼지도 모르겠다.
학교와 어깨동무한 건물들을 따라 걸으며 윈도우 쇼핑을 했다. 명품 가게가 몰려있는, 아마도 도시에서 가장 화려한 쇼핑거리였을 것이다. 엄마가 가장 재밌어한 건 루이뷔통 디스플레이였다. 레고로 만든 트리가 하찮은 듯 화려했다. 엄마 요청으로 사진을 찍었고 게시는 무단으로 한다.
도시가 급격히 한가해지는 경계를 넘어서지 않았다. 민트초코가 맛있다는 페드로치 카페를 찾는데 동네를 두 바퀴 돌았다. 알고보니 카페 앞을 두 번 지났다. 민트초코 아닌 에스프레소는 맛 없다는 블로그를 읽은 기억이 났다. 먹어보고 하는 말인데, 완전히 동의한다.
기차역으로 가는 길에 스크로베니 예배당에 들러 숨을 골랐다. 엄마는 예배당 앞마당에 전시된 현대 조각품들을 흥미로워했다. 역시 엄마는 모던해. 사진을 몇 장 찍고 벤치에 앉는다. 긴 비행 탓인 것 같은데 허리가 안 좋다. 이러다 자칫 잘못하면 여행이고 나발이고 그 자리에 드러눕게 생겼다. 건강관리 담당답게 엄마는 약국에 가서 진통제라도 사자고 이미 여러 번 말했다. 베네치아에 돌아가서 근육이완제를 사겠다고 또 한번 중요한 일을 미룬다.
자리를 뜨기 전, 개인 과제 수행을 위해 포켓몬을 잡았다. 여행 내내 내가 포케몬고 앱을 켜기만 하면 엄마가 웃었다. 엄마가 우스워하는 게 좋다. 이탈리아 베네토 지방에서 잡은 포켓몬이라. 포케몬고를 벌써 오래 하고 있는 감자에게 소소한 즐거움이 됐으면 좋겠다. 나라는 인간이라면, 이번에도 우물쭈물하다 제대로 된 여행 선물도 못할 가능성이 높다. 친구의 유별난 이탈리아 피버를 감자가 수용 가능한 방식으로,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미지근하게나마 전하고 싶었다.
여유있게 역으로 향한다. 하지만 오늘의 투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