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 앤더슨의 ‘문라이즈 킹덤’을 다시 보고 있다. 괴로운 아이와 외로운 아이가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의 편이 되어 주는 영화, (대부분의) 주변 어른들과 아이들도 그들을 지키고 도우려 하는 영화.
다시 본 영화는 기억만큼 슬프지 않다. 이 영화에 대해서라면 안타깝다는 감정이 지배적이었다. 수지와 샘 이야기는 로라 비숍과 샤프 소장의 이야기와 겹쳐지는데, 아이들의 사랑은 해피앤딩을 향하지만 어른(들)의 사랑은 쓸쓸하게 끝나는 결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처음 봤을 때 후자의 쓸쓸함이 더 인상적이었던가보다. 위탁 가정에서 여러 차례 거절당한 데다, 자칫 전기충격을 받아야 할지 모르는 샘의 상황에 큰 충격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 내 마음을 이번에는 카키 스카우트 55 대원들이 제법 데워주었다. 정서가 불안정하고 좋아하지 않는 녀석이긴 하지만 우리가 너무 비열했어. 어쨌든 동료인데 우리가 도와야지 않겠나 형제들! 게다가 걔들, 사랑한다는데! 라고 말하는 녀석들, 꽤 괜찮은 인간들이었다.
가출했던 수지를 집에 데려와 씻기는 욕조 장면은 중요하기도 하지만 아름답기도 하다. 다만 그 아름다움에는 애잔함이 깃들어있다. 이 애잔함은 물론 복잡한 사정에 있는 엄마와 그런 엄마를 보는 딸의 복잡한 심정, 그리고 이 사정과 심정이 맞부딪히는 갈등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또한 우리 둘은 사랑하는데 왜 헤어져야 하나요, 라는 수지의 말대로 헤어진 연인들의 슬픔에서 나오기도 한다. 이 장면이 더욱 아름다울 수 있도록 거드는 것은 배경에 흐르는 슈베르트의 가곡 ‘An die musik’이다. 낭만주의 음악이 뭐냐고 물으면 앞으로 나는 이 음악으로 답하리라. 고도로 감정적인 순간, 격앙된 감정이 이토록 솔직하게 노래되게 하는 건 슈베르트 뿐인지도 모른다. 이건 정말이지 슈베르트(만)의 빼어난 재능이다. 이 곡에서 고조된 감정은 충만함과 고마움이리라 혼자 추측한다. 흠, 감격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음악은 이렇게 미간을 끌어올리니까. 웨스 앤더슨은 작품마다 바흐, 모차르트 등을 삽입하곤 하는데 최근에는 단편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에서 모차르트 오페라 ’콘치 판 투테‘의 ’Soave sia il vento’를 쓴 게 무척 좋았다. 그의 영화에 숨겨진 보석 같은 클래식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아, 이 영화 ‘문라이즈 킹덤’에 삽입된 브리튼의 어린이 합창곡들 역시 좋다(그렇다 나는 브리튼을 좋아한다…).
한편, 수지의 망원경에 백조가 잡힌 장면에서 정말 놀랐다. 전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이 백조 장면이 매우 선명한 복선이자 상징, 메타포로 읽혔기 때문이다. 작년에 넷플릭스에서는 로알드 달 원작을 단편영화한 작품 네 편이 공개되었다. 감독은 웨스 앤더슨. 그 중 한편이 ‘백조’였는데, 아이들에게 괴롭힘 당하던 소년이 끝내 희생당하는 슬프고 잔혹한 이야기이다. 이때 백조는 소년이 지키고 싶어하던 대상에서 점차 희생자인 자신으로 동일시된다. 가장 비극적인 순간에 소년-백조는 일치한다. 영화 말미에는 영국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으로 로알드 달이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다가 작품화 했다는 사연이 조용히 소개된다. 너무나 끔찍하고 슬픈 이야기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픈데, 넷플릭스에서 썸네일로도 소개되는 백조 신의 이미지가 수지의 망원경에 들어온 백조와 거의 같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웨스 앤더슨도 로알드 달의 ‘백조’를 오래도록 마음에 품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러다 또래 친구들에게 따돌림 받는 샘에 로알드 달의 백조를 겹쳐놓은 것은 아닐까?
조류에 밝지 않은 내가 거위를 백조로 착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 착각이 만들어낸 이 글에도 나름의 진실은 있겠지. 동시대 작가의 작품을 본다는 묘미를 웨스 앤더슨에서 느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