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 유감

솔직히 인상파 이전에 프랑스가 미술에 한 기여가 뭐가 있냐

by 만정

루브르에는 이탈리아 화가들 작품이 착취당하는 외국인 노동자처럼 걸려있다. 기를란다요, 만테냐, 페루지노는 물론이고 라파엘로나 카라바조, 심지어는 모나리자를 제외한 다빈치도 마찬가지 신세다. 긴 복도 양측에 그림들이 하릴없이 붙어 있다. 이들은 온통 모나리자 생각뿐인 관람객이 스쳐가는 길과 별다르지 않아 보인다. 위대한 작가와 그림들은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채 관람객들이 만들어내는 엄청난 동시에 끊임없는 소음에 이미 귀가 멀었을 것이다.

더 비참한 화가들은 모나리자와 같은 방에 있는 베네치아 르네상스 화가들이다. 베네치아 아카데미 소장품보다 한참 더 큰 베로네제를 훔쳐서는 모나리자 맞은편에 걸다니. 비열한 프랑스인들 같으니라고. 그러나 이마저도 티치아노의 비참함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아마 베네치아와 피렌체를 비롯한 이탈리아 전체가 가진 티치아노보다 루브르에 있는 티치아노 작품 수가 더 많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많은 티치아노가 별 주목도 받지 못한 채 저 두 그림 양측면을 채우고 있다. 척 보기에도 훌륭한 남자 초상화와 드물게 보이는 종교화 두 점, 특히 매우 흥미로워 보이는 예수 만찬 장면은 관람객 동선 밖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자국 왕일뿐 아니라 다빈치를 프랑스로 모셔옴으로써 다빈치를 여섯 점이나 루브르에 들이는 장본인인 프랑수아 1세를 그린 티치아노 작품을 조명도 잘 못 받는 모나리자 뒷면에 걸어두었다. 그 옆에는 한눈에 조르조네를 상기시키는 티치아노의 ‘전원 연주회’가 역시 조명과 관객에게 소외당한 채 걸려 있다. 통탄할 일이다.

이 그림들은 디귿자 형태의 루브르 건물 남쪽 디농관 1층에 위치하는데, 반대편 날개인 리슐리외관까지 보고 나니 이탈리아 작품들 노동 환경이 한결 더 비참해 보인다. 리슐리외관에는 북유럽 화가들이 제대로 된 방에 제대로 된 관람객 의자도 갖춘 채 매우 우아하게 걸려 있었다. 방문객이 적어서 가능한 일이라는 반론이 있을 수도 있지만 나는 단호하게 사양할 것이다. 램브란트, 아니 루벤스, 아니 하다 못해 두 점 밖에 없는 베르메르도 관람객의 주목을 받기 충분한, 다시 말해 현대 미술관 입장에서 정상적인 전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아, 이 모습을 마주한 나는 그만 스스로가 이탈리아 작품의 작가인 것처럼 비참한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사실, 프랑스가 미술사에서 19세기가 다 되도록 한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그건 프랑스 회화관이 루브르 전체 규모에서 차지하는 비율만 봐도 답이 나오는 문제다. 따지고 보면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화가들에 비할 수 없는 양과 수준으로 유파라고 할 것도 없는 점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객관적 사실 아닌가. 외부영입과 약탈로 채운 소장품들을 이렇게 대접 하리라고는 예기치 못했기 때문에 사실 나는 매우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오르세에 인상파 전후 19세기 화가들 그림이 얼마나 매력적으로 전시되어 있는지를 확인한 나는 기쁨과 동시에 슬픔과 분함을 느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본국 소장품보다 많을 르네상스 화가들 그림을 관람객으로서 차분히 감상할 기회, 그뿐이다. 너무 많은 관람객 수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그림의 가치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기를, 약탈품들을(물론 사들인 작품도 있다는 사실을 나도 안다) 굳이 안 돌려주고 갖고 있겠다니 어쩔 수 없이 그 그림들을 찾아 루브르에 올 수밖에 없는 나 같은 관광객에게 마땅한 대가를 치러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피치라면 티치아노와 라파엘, 다빈치를 저렇게 전시할 리 없지 않겠는가.

런던 내셔널 갤러리만 해도 소장품들을 애지중지한다고 나는 느꼈다. 물론 얀 호사르트Jan Gossart와 브뤼겔의 수태고지가 얀 반 에이크의 저 유명한 ‘아르놀피니 부부 초상화‘와 2미터 채 되지 않는 거리를 두고 서로 민망하게 마주 보고 있기는 했지만 이 부당한 배치가 임시 조치라고 나는 어쩐지 믿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내셔널 갤러리를 비교적, 상대적으로 신뢰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게다가 그런 그림들을 전세계인에게 무료 개방하는 기관이지 않는가. 얼마나 환상적인 일인지! 모든 미술관이 반드시 내셔널 갤러리와 같은 방식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열악한 루브르 관람 환경은 내게 소중한 이 그림들을 다시 보러 오고 싶은 마음과 이런 환경에서는 다시 봐도 무의미하다는 회의가 내적 갈등을 일으키도록 하고 만다.


그런 한편으로는, 얀 반 에이크의 ‘롤랑의 성모’가 말도 안될 정도로 좋아져서 마음 한쪽이 벅차올라 있다. 같은 방에 걸린 한스 멤링들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물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고 명확하게, 매우 섬세하게 그려져 있어 들여다볼수록 세부묘사를 파고들게 한다. 시선을 붙잡는 힘이 강력한 그림들이다. 아직 이탈리아 화가들이 템페라를 그리던 시절 유화를 작업했다는 게 이런 차이를 만들어 내나 생각하기도 한다. 이들 그림에 대해서는 따로 장을 만들어 얼마나 신나고 재미있는지 늘어놓을 참이다.


욕을 한참 했지만 더 할 욕이 있다. 당연히 비너스에 관해 피렌체 가이드의 관점에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마 루브르를 재차 방문할 것이다. 그것이 기정사실처럼 명확해서 분하고 분하다.

매거진의 이전글카라바조, 현실의 합리적 재구성과 규칙의 전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