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조, 엠마오에서의 만찬(내셔널 갤러리, 런던)
다시 돌아가서, 마침내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있는 카라바조 세 점을 보았다. 지금 세 점은 다음 순서로 걸려있다. 왼쪽부터 ‘도마뱀에 물린 소년(1594-5)’, ‘엠마오에서의 만찬(1601)’,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들고 있는 살로메(1609-10)‘. 이때, 엠마오와 살로메 사이에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자화상이 슬쩍 끼어들어있다. 이 배치가 내게는 우연처럼 보이지 않는다.
‘엠마오에서의 만찬‘은 확실히 걸작이다. 카라바조의 특성, 거의 모든 예술적 전략이 매우 선명하게 드러난다. 지금껏 내가 본 모든 카라바조 중, 가장 무르익었다고는 못해도 가장 특징적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제일 두드러진 특징은 탄탄한 구조이다. ‘엠마오에서의 만찬’에서 좌측에 서 있는 남자 시선을 따라 오른쪽 아래로 향하면 그림 밖 관객 쪽으로 오른팔을 뻗은 예수가 있다. 예수 머리통을 중심으로 둔각의 낮은 이등변 삼각형을 이루는 자리에 다른 두 남자의 머리가 위치한다. 사실 네 사람의 머리는 삼각형 구도를 이룬다. 예수 뒤쪽으로 진 어두운 그림자가 노골적인 연결을 살짝 방해하면서 눈에 띄는 단순한 구성을 변주한다. 또한 테이블 측면에 앉은 남자가 팔을 벌림으로써, 또 모서리 쪽에 관객을 비껴 등지고 앉은 남자가 놀라 앉고 있는 의자를 밀어내느라 팔꿈치를 그림 바깥쪽 방향으로 밀어내는 자세를 취함으로써 평면인 그림의 공간은 화폭 자체를 확장하는 듯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구조는 재미있는 도구다. 마치 근원적인 의도나 뼈대를 간파해내기라도 한 듯 쾌감을 느끼게 한다. 다시 말해 이해했다는 느낌을 쉽게 준다. 때로는 그럴듯하고 때로는 말도 안되는 것 같은, 때로는 유용하고 때로는 쓸모 없는 임의의 프레임워크지만 우리는 구조를 발견하고 안심한다, 의지한다. 나쁜 경우 의기양양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조를 생각하는
것은 이해에 도움이 된다. 적어도 나는 구조에 자주 의지한다. 뿐만 아니라 흥미로운 작업이기도 하다. 그림에서 조형적인 배치를 읽어내는 일이든 음악에서 개별 음표가 아닌 화음 진행을 읽어내는 일이든.
전문가들의 용어와 이론에는 벗어날지도 모르겠지만, 이 그림에서 구조는 선뿐 아니라 색에 의해서도 형성된다. 그림에서 가장 밝은 흰색은 식탁보를 중심으로 왼쪽에 선 남자 오른 팔뚝 높이로 말아 올린 흰 소매, 오른쪽 남자 무릎 위에 놓인 흰 천을 따라 또 하나의 대각선 축을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색은 구도와 배치를 감안해 균형추처럼 작동한다.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 이 그림 속에서는 모든 게 제자리에 있다. 제자리에 있다는 느낌. 적절하다는 느낌. 분석과 설명이 가능하긴 할까? 분석하고 설명하면서도 회의하지만 이 그림은 절망적인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킨다. 그 정도로 매우 드문 성취다, 그림에서 무언가 제자리에 있다는 느낌을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는 것은.
엠마오와 같이 훌륭한 카라바조 그림들에서 내가 받는 지배적인 느낌은 화폭이 꽉 차있다는 것이다. 마치 클로즈업 한 사진같다. 단지 캔버스에 여백이 없다는 물리적인 현상 이상을 의미한다. 그보다는 유기적으로 메워져 있다는 느낌에 가깝다. 이 ‘느낌’은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일까?
한 가지는, 구성요소들 간의 관계에 대한 카라바조 특유의 절묘한 정의 혹은 감각에 기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림 속 인물과 인물, 인물과 사물들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적절한지! 이 적절함은 너무나 감탄을 일으키기 때문에 느낌표에 인색한 나조차 여기서는 아낄 방법을 찾지 못한다. 인물들과 사물들은 가깝거나 거리를 두고 이것은 어떤 화가의 어떤 작품에서나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카라바조의 경우, 이 거리는 무척 절묘해서 구성요소들은 그림 속 관계에서 자기가 부여받은 역할을 더 효과적으로 역설하는 것처럼 내게는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무의식적 감각에서 나오는 힘인지, 의식적인 전략의 성공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흔히 카라바조 그림이 “극적이다“, ”연극적이다“, ”드라마틱하다“고 말할 때 거론하는 강한 명암 대비, 그림 속 인물들의 극적인 자세에 결정적인 긴장감을 불어넣는 것은 그들 사이에 적확한 관계를 만들어내고야 마는 배치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엠마오에서의 만찬‘은 이점이 특히 탁월한 작품이다.
바로 이 이유로 나는 엠마오 바로 옆이 아닌 옆옆 자리에 살로메가 걸렸다고 생각한다. 살로메 속 세 인물과 세례자 요한의 잘린 머리는 어정쩡한 거리에 있다. 그 어정쩡함이 거리의 문제인지 색의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세 사람은 너무 멀다. 마치 관련이 없는 사람들처럼. 그 느슨한 관계는 그림의 긴장감을 떨어뜨린다. 잘린 머리를 보여주는 자극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단지 참수된 머리에서 거리를 두려는 그림 속 인물들의 심경을 반영한 것 이상의 부적절한 거리감이다. 이에 비하면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자화상은 훨씬 탄탄하고 안정된 구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엠마오의 만찬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화가를 넘어서 작품의 내적 완성도 측면에서 그렇다. 붓의 터치도 엠마오가 살로메에 비할 수 없이 곱고 섬세하다. 자국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유려하다. 그에 비하면 살로메는 거칠다기보다는 일부러 남긴 것처럼 붓의 흐름을 드러낸다. 새로운 시도, 작가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몇몇 이런 그림이 내게는 다른 화가 작품처럼 낯설다.
두번째로 카라바조 그림이 내 주목을 끄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용어는 ‘현실의 합리적 재구성‘이다. ‘엠마오에서의 만찬’을 위시한 그의 뛰어난 종교화들에서 지금 내게 가장 돋보이는 카라바조의 예술적 특성은 이상하게도 하버마스를 상기시킨다. 현실의 합리적 재구성. 이론에 관한 이 이론은 이론이라는 구성물이 현실 그 자체와 등가가 아님을 전제한다. 즉 이론은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 또는 재현할 수 없다. 현실은 실상 무의미한 혹은 반대로 의미로 가득한 순간의 쉼 없는 연속이므로 일종의 구조, 프레임워크 없이는 볼 수도 해석해낼 수도 없는 대상인 것이다. 우리는 현실과 현상을 읽고 보고 해석 가능하도록 재구성한다. 위대한 이론가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개인 단위에서 해석하고 재해석한다. 현대 상담의 방법론이 자기 현실에 대한 다른 의미부여 작업이라는 것은 결코 무관한 현상이 아닐 것이다. 새로운 의미부여, 자기 인생에 대한 새로운 해석 혹은 이론의 구축. 이 어휘들은 유의어처럼 서로를 대체하는 데 문제가 없다.
물론 어떤 이론은 더 설명력이 강할 수도 있고 다른 이론은 덜할 수도 있다. 더 설득력 있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십 오년 전 내가 아직 학교에 있을 때는 각 이론들 사이에 더 ‘진실에 가까운’이라는 척도는 적용하기를 망설이는 것이 유행이었다. 학교를 떠난지 너무 오래 된 지금은 이론에 대한 이론이 어디까지 갔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이 모든 것을 포섭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은 첨단의 뇌과학이 증명하는 단계에 이른 게 아닌가 싶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 중 어떤 일부만을 본다,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재구성한다.
하나의 이론이, 즉 재구성 결과가 더 그럴 듯하고 설명력 있고 더 설득력 있는지는 그 구성물의 합리성에 달려있다. 우리는 그 구성물이 앞뒤 진술을 배반하지 않는지, 제시하는 근거가 옳은지 그른지 판단한다. 근대 이후의 세계에 사는 우리에게 신의 존재나 그의 개입, 절대 권력자의 권위는 더 이상 합리성의 근거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론에 대한 하버마스의 고찰이 내게는 예술의 일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예를 들어, 시나 소설 창작 수업에서 작품은 결국 대개 허구인데 그것이 현실의 모든 측면과 시간을 모든 관점에서 재현해 낼 수 없기 때문이라고 가르치는 건 이런 의미에서 완전히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조언이다. 대상을 다양한 관점에서 재현한 입체파마저도 어떤 의미에서는 여전히 나름의 합리적 재구성을 벗어나지 않는다. 결국 현실 그 자체가 아닌 작가가 재구성해낸 현실, 그것만이 문학적-예술적 의미를 획득한다. 혹은 재구성을 배제한 현실의 묘사 혹은 현실 그 자체는 문학적-예술적 효용을 거의 가질 수 없게 된다. 이때 합리성은 작품의 내적 일관성과 현실성을 담보하는 요소이며, 결국은 작가의 혹은 작품의 관점에 다름 아니다. 하나의 관점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 외의 것들은 철저히, 가능하면 더 깨끗하게 배제하는 방식으로 고도의 합리성을 획득한다.
이런 맥락에서 현실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하는 데에 카라바조만큼 탁월한 예술가가 있을까? 캔버스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처럼 농축해서 표현하는 이는 드물다. 단순히 농축했을 뿐 아니라 자기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에 대한 고도의 집중력을 드러낸다. 그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꽉 차있다는 느낌은 이같이 완전히 포커스 된 결과에 가까워 보인다. 그림뿐 아니라 예술 분야 전체를 봐도 이 정도 수준에 도달한 작품은 많지 않다. 널리 알려진 표현으로 그의 그림이 “드라마틱하다”, “연극적이다“라고 이르는 것은 카라바조의 뛰어난 합리적 재구성 결과를 이르는 다른 표현일 것이다. 카라바조는 자신이 그리려는 정황을 가장 극적인 순간으로 재구성하여 이미지라는 형식으로 재현해 낸 것이다.
그렇게 재현한 대상이 천한 신분의 실제 인간, 피와 살을 가진 자기 주변 사람들이 분한 성인이라는 것이 카라바조가 내용적으로 도발적인 면이다. 손톱에 때가 낀 예수, 꼬질꼬질한 성모와 아기 예수, 더러운 맨발로 배가 부푼 채 죽어 있는 성모 마리아. 성스러운 것을 성스럽게 그리던 당시 다른 그림들을 생각하면 이것은 장field 규칙에 대한 전복적 시도이기도 하다. 이것이 예술 장에서 성공하기 위한 그만의 의식적 전략이었을지, 그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기질의 발현인지 지금의 나는 역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카라바조가 이후 일련의 화가들에 미친 영향 가운데에는 이같은 대상의 재현 방식도 포함된다. 나는 여기서 더 갈 수 없지만, 부르디외의 장 이론으로 카라바조를 분석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한편, 손톱에 때가 낀 예수, 꼬질꼬질한 성모와 아기 예수, 더러운 맨발로 배가 부푼 채 죽어 있는 성모 마리아는 성스러움을 세속적인 이미지로 재현해냄으로서 의미와 재현 사이에 끝없는 갈등을 내재화 해버렸다. 보는 사람은 이 화해하기 어려운 갈등, 인지 부조화 때문에라도 그의 그림 앞을 쉽게 떠나기 어렵다. 물론 이 갈등이 삶에 대한 진실을 드러낸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성속은 인간사에 어찌나 뒤엉켜 있는지. 인간 삶에 대한 진실을 담은 작품은 어떻게든 사랑받게 된다.
앞선 스스로의 주장에 대한 반박처럼, 나는 로마 바르베리니에 있는 성 프란체스코를 떠올린다. 큰 화폭 가득 전신이 클로즈업된 무릎 꿇은 모습의 이 성자는 그의 다른 그림에 비하면 상당히 조신하다. 성자를 가난하고 천한 자로 재현해 낸 카라바조의 도발이 어쩐지 가난의 성인을 가난하게만 표현 데까지만 이른 것처럼 보여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그림의 단순한 구도와 구성에 감탄한다. 사실 카라바조의 훌륭한 구성은 크고 작음,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되새기면서.
참고자료
https://youtu.be/1KcdgFxmnb4?si=uuKO1yDw-aG4yT9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