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 환상, 닿을 수 없는

모네, 라 그르누예르의 수영객들(내셔널 갤러리, 런던)

by 만정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품 목록에서 눈에 띄는 컬렉션이 있었다. 바로 인상주의. 이 미술관은 세잔과 모네, 드가를 제법 풍부하게 소장, 전시하고 있다. 프랑스 근대 화가들을 이렇게 많이? 지리적으로나 시기적으로나 의외라는 게 내 첫 반응이었지만, 곧 수긍했다. 서구 주류 회화 역사에 완전히 부합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화파, 이름만 들으면 다 아는 화가들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내셔널 갤러리는 약간의 고흐를 곁들인다(한 큐레이터는 어떤 유튜브 영상에서 말한 적이 있다. 관람객들이 미술관에 와서 딱 세 점을 찾는데, 하나는 다 빈치의 ‘암굴의 성모’, 또 하나가 고흐의 ‘해바라기’라고. 다른 한 점은… 잊어버렸다). 인상주의와 표현주의까지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내셔널 갤러리는 초기 르네상스에서 근대까지 서양 미술사를 설명하기에 손색없는 컬렉션을 보유한 셈이다. 주요 흐름과 별개로, 이 미술관이 의외로 많은 작품을 보유한 몇몇 작가들은 다른 장에서 별도로 다루겠다.

인상파 그림은 사랑하지 않기 어렵다, 는 진술로 다시 돌아가보자. 새로운 흐름은 당대 주류 입장에서 비판과 비난, 저항을 받게 마련이다. 피카소와 고갱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모네는 그랬다. 인상파라는 명명이 실은 멸칭이었다는 유래가 말해주는 바다. 미국, 그러니까 저항할 기존 역사가 없던 땅에서 모네가 인기를 얻은 건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모네 그림을 쉽게 사랑한다. 할 수 있다. 르누아르나 드가처럼. 모네 그림의 소재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근대 문물과 삶을 보여주기 때문이고 그 삶은 귀족적인 것과 이미 거리가 멀다. 도시가 아니면 자연을 그렸다. 지베르니 정원과 수련처럼. 역사와 상징으로부터 해방된, 시각적 쾌감이라는 기준에서 인상주의의 미술, 색과 형체의 미술은 오히려 누구나 사랑하기 쉬운 대상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백년 후에도 유효한 진술은 아닐 수도 있다. 미와 추는 역사와 사회에 따라 가변적인 개념이므로.

모네의 ‘라 그르누예르의 수영객들(1869)’은 ‘정원의 여자들(1866)’에 비하면 아주 작은 그림이다. 이 그림 오른쪽 아래 출렁이는 물결을 보던 나는 홀린 듯 그림에 다가갔다. 마음에 드는 그림에게 자주 취하는 행위다. 그런데 거기에는 물결이 없었다. 반짝이는 빛이 반사되는 강물, 출렁이는 움직임 비슷한 어떤 형체도. 희거나 어두운 선들만이 가로로 짧게 그어져 있을 뿐이었다. 어떤 인식 가능한 형체로도 귀속되지 않는, 임의의,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물감 흔적만이. 다가가면 갈수록 아무렇게나 덕지덕지 바른 것 같은 물감 덩어리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원리적으로 이해 못 할 바가 아니면서도 나는 좀 충격을 받았다. 이전 화가들이 잡아내려고 했을 형상의 세밀한 일부는 이제 캔버스에 존재하지 않았다. 며칠 후 완전히 나를 사로잡게 될 얀 반 에이크의 그림 ‘서기관 롤랭의 성 모자(루브르 박물관, 파리)‘ 속 창문 유리(아래 왼쪽 사진)는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도 유리였고 롤랑이 걸친 가운의 섬유 질감은 가까이서 볼수록 더 진짜처럼 보였다. 보기만 했는데도 보드라운 것 같았다. 카라바조의 ‘엠마오에서의 만찬’ 속 유리병은 마음을 찡하게 할 정도로 진짜처럼 빛을 반사하고 있었고 그 안에 담긴 물은 투명한, 부피와 무게를 지닌 현실의 물을 어떤 거리에서나 재현해냈다. 그림자까지도(아래 오른쪽 사진). 그런데 이다지도 사랑스러운 모네의 강물은 가까이서 보면 사라졌다. 물결도, 물결에 진 보트 그림자도, 수영객들도.

사라진 아름다운 그림을 되찾기 위해 나는 다시 그림에서 멀찍이 떨어져 섰다. 내 시각은 캔버스 위 물감 덩어리를 인식 가능한 형상, 나무, 사람, 물결로 즉각 변환하지 못했다. 다른 그림으로 눈을 돌렸다. 잠시 후, 그림을 보자 수영객이 있는 강가 풍경이 다시 나타났다. 나는 다시 아름다운 강변에 다가갔다. 결과는 당연히 같았다. 도무지 잡을 수 없는 아름다움, 가까이 가서는 오히려 도달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머리로는 원리를 이해하면서도 묘하게 허망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아무 것도 없는 그림은 다른 진실을 담지한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림이 아무리 물결의 찰랑임을 재현해도 그것은 물이 아니다. 물이지만 손과 몸을 담가 적실 수 있는 물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오르세 5층에는 인상파 화가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끝에는 시각적 정보로서의 색을 넘어 자기 내면의 진실로서의 색과 형태를 그리는 고흐가 있다. 5층에서 나는 모네를 마음껏 보았는데 모두가 아름답고 유명하지만 양산을 들고 있는 여자(1886) 앞에서 특히 입을 좀 벌리고 서 있었던 것 같다. 그림 속 여자는 아마도 까미유겠지만 얼굴 윤곽도 제목에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앞선 그림들에 비해 형체는 더 모호해진 듯하다.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이 그림 전체를 지배하는 분홍빛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내 사진 따위로는 절대 재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유가 아니라면 내가 이렇게까지 그림 코앞에 실제로 도달하기 위해 열심일 리 없었을 것이다.

입을 벌린 채 넋을 좀 놓고 바라보다 가까이 다가가자 당연히 같은 일이 일어난다. 꽃과 풀의 재현으로 짐작되는 색들이 바람을 맞은 듯 방향을 달리 한 선을 긋고 있다. 이 신기루 같은 아름다움이란.

그건 그렇고 모네는 대체 어떻게 이런 순간을 볼 수 있었을까? 또 시각적으로 기억해 낸 걸까? 너무나 궁금하다. 내게 불가능한 일은 자주 불가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