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갈, 주관적 진실의 재현

샤갈, 에펠탑의 신랑신부(조르주 퐁피두 센터, 파리)

by 만정

예기치 않은 조우였다. 1906년 이후 시기 그림이 퐁피두에 있다는 정보를 이날 오전 획득했다. 그러나, 그러므로 샤갈이 여기 있을 수 있다는 추론에 미처 이르지 못한 채였다.

"염소 없이는 이 그림에 아무런 의미도 없죠."

영화 노팅힐 여주인공은 샤갈의 그림 '신부'에 대해 말한다. 남자 주인공에게 고백하면서 선물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그럴 법하다. 샤갈은 아내 벨라를 사랑했고 둘의 결혼이 얼마나 행복한 사건이었는지에 대한 작가의 기억과 감정을 환상적으로 시각화했으니까.

그 그림이 바로 '에펠탑의 신랑신부(1938년)'다. 노팅힐 주인공 질문이 이 그림에서 길어 올린 것은 아니지만 이 그림에서도 나무 위 염소를 찾을 수 있다. 샤갈 그림에 염소는 닭이나 천사, 바이올린처럼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염소가 이 그림에 부여하는 의미는 뭘까? 답을 찾지 못해서 애나의 질문과 이 그림 모두 내게 잊을 수 없는 것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오래전, 나는 '에펠탑의 신랑신부'의 작은 복제품을 샀었다. 언제였을까? 예술의 전당에서 인상주의 전시가 크게 있었는데 그때 뮤지엄 숍에서? 그렇다면 지난 세기 말일 수도 있다. 광흥창 자취방 책장 위에 있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렇다면 2000년대 중반의 유물인가? 이제는 확신할 수 없는 기억들 속에서 가로 세로 십 센티가 안 됐을 작은 복제품도 유실되었다. 노팅힐 주인공이나 샤갈이 경험한 행복한 결혼식이 내 생에 없을 일이라고 받아들인 다음 이사를 준비하면서 이 아름다운 그림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때는 이 그림을 두고 보는 게 슬펐고 마음이 아팠다. 십 센티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이제는 아련한 기억이다. 어쩌면 아직 집안 어디 어떤 박스 안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버리지는 않았지만 더는 열지 않는 몇 개의 박스 안 어딘가에. 그런 그림을 실제로 가까이서 마주하게 된 것이다.

예기치 않게 영접한 실물의 인상. 우선 컸다. 매우. 둘째, 왼쪽 위 태양이 눈부시다. 가이드는 이 그림이 남부로 이사한 후 그려졌다고 설명해 주었다. 프랑스 남부 햇살이란 저렇게 찬란한 걸까? 그렇다면 그곳 사람들은 삶을 사랑하지 않기 어려울 것이다. 그 옆의 천사는 그 빛 때문인지 존재 자체의 특징 때문인지 몸통이 거의 투명하다고 느껴질 지경이었다. 염소보다는 태양 빛과 천사를 보느라 이 그림 앞에 오래 서 있었다. 가이드 투어에서는 감상할 시간이 충분치 않아 다음날 혼자 찾아가 다시 한참을 바라보았다. 사진도 몇 장이나 찍어봤는데 내 솜씨로는 내 눈이 보는 투명하고 맑은 햇살을 옮길 수 없었다. 사진 속 해는 텁텁하고 두꺼운 물감 자국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샤갈 방에서 새롭게 인지한 작품은 '그녀 주위에(1945년)'이다. 이 강렬한 파란색에 나는 완전히 붙들렸다. 한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 그림 무서워!"

위 사진을 받은 감자는 즉각 알아차렸던 것 같다. 이 그림의 정서를. 나는 사실 꽤 오랫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정서를. 사랑하는 아내가 갑작스럽게 죽자 샤갈은 한동안 그림조차 그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림의 파란색은 에펠탑의 파란색과 달리 슬픔이다. 그 정서가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이 그림에 강력한 무언가가 있다고는 나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를 붙잡아둔 그림의 힘이 다른 관객에게도 작용하는 모습 역시 내가 목격했기 때문이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한 한국 남성은 몇 번이나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 그림 대단한데. 내 느낌으로는 같이 온 여성은 이 대단함을 공유하지 못한 것 같다. 모든 그림이 누구에게나 통하는 건 아니니까. 우리가 모두 같은 것을 보는 것은 아니니까.


한편, 샤갈의 그림에서 시 쓰기를 떠올린다. 그의 생애나 삶의 조건, 기쁨과 행복, 슬픔과 고통은 매우 개인적인 방식으로 캔버스에 펼쳐진다. 샤갈의 캔버스 위에서 사물 그 자체의 형태와 색, 현실에서 가능한 움직임을 그대로 재현하려는 어떠한 의도와 의지도 느껴지지 않는다. 주관적 진실. 그것만이 그가 보고 듣고 재현하려 했던 것임에 틀림없다. 물론 모든 그림이 이렇게 그려지지 않듯 모든 시인이 이런 시를 쓰는 것은 아니다. 때로 이런 시는 최소한의 의사소통에 실패한 시, 그러니까 잘못 쓴 시로 남겨지고 만다.

샤갈은 성공했다. 그의 생애와 작품의 배경을 모르는 사람도 그의 태양에서 환희와 기쁨을, 그의 파란색 배경에서 관람객을 압도하는 공포와 슬픔을 감지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림 앞에 머무른다. 주관성에 갇힌 실패한 예술과 주관적 진실로 소통에 성공하는 예술. 결국에는 매체의 특징, 그러니까 색과 형태, 혹은 언어 그 자체가 중요한지도 모르겠다. 사실 모르겠다. 나는 그 앞에서 아직 조금 갈팡질팡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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