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미술관을 특별히 좋게 기억하게 된 이유가 뭘까? 런던에서 방문했던 다른 공공 미술관과 박물관, 그러니까 내셔널 갤러리,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 테이트 모던과 브리튼, 대영 박물관처럼 무료도 아닌데. 이들 기관처럼 으리으리한 건물에 방대한 작품을 전시하는 것도 아닌데.
이 질문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답은 의외로 건물과 공간 그 자체다. 너무 크고 넓은 전시장과 너무 많은 작품은 사실 나를 겁먹게 만든다. 웃길 수도 있지만 나는 미술관내 지리를 외우려 노력한다. 우피치에서 들인 습관이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주요 작품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이 두 가지 문제에 신경 쓰느라 작품에 집중하지 못하는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서다(이게 다 첫 방문 때 투어 가이드를 잘 만난 덕분이다. 강화자 가이드님, 여러 모로 감사합니다. 책 내주신 덕분에 혼자 피렌체 다니며 복습도 잘했습니다). 조금 있으면 또 보고 싶어 질 텐데 마음먹으면 버스 타고 금세 갈 수 있는 환기 미술관이 아니니까. 게다가 내가 미술관을 휘젓고 돌아다닐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세 시간. 아무리 사랑해도 더는 힘들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길을 잃지 않으면서 꼭 봐야 할 작품을 일별 하는 사이사이 새롭게 눈에 드는 작품 앞에서 시간을 좀 보내는 방식으로 쉼 없이 우피치 3층 관람을 마치는 데 두 시간 정도가 걸린다. 아래층에는 카라바조며 티치아노며 아직 볼 게 수두룩 하지만 카라바조를 보고 나면 지치고 힘들어 나머지 구간은 여전히 흐지부지 되고 만다. 분하다.
우피치는 사무실이었는데도 그런 크기였다. 하물며 루브르는 궁전이었다는데. 어마어마할 건물 크기가 여행 전부터 주는 위압감을 극복하기 위해 나는 가이드 투어 신청도 했지만 한국에서 이미 루브르 전체 지도를 연구해 두었다. 건물 구조와 각 건물별 주요 전시 작품을 숙지하는 데 공을 들였다. 수년 전 바티칸 가이드 투어를 받은 기억으로 가볍게 몸만 갔다가 입구 통과 직후 미아처럼 얼어붙었던 작년 경험 덕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막상 루브르에 혼자 갔을 때 디농관과 리슐리외관 연결부를 찾느라 애를 먹었다.
미술관으로 개방된 코톨드 3층 건물의 전시 면적은 체감 상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과 비슷하다. 궁전이나 시청이 아니라 좀 사는 집 저택에 방문하는 기분이다. 으리으리하지 않은 규모 덕분에 오히려 편안한 마음으로 여유를 가지고 접근할 수 있었다. 입구에서 안내받은 대로 3층에서 관람을 시작하기 위해 계단을 오른다. 이 계단이 매우 특징적이고 아름다운데 난간의 파란색이 어딘지 영국적인 데가 있다. 소장품들만큼 인상적이다.
코톨드는 크기뿐 아니라 분위기도 아담하다. 천천히 작품마다 시간을 들여 감상하기에 좋았다. 무엇보다 각 작품에 붙은 설명이 매우 수준 높았다. 양질의 사실과 의미를 전달하는 좋은 문장, 공들인 글이었다. 특히 인상파 전시실 세잔 그림 몇 점에 대한 설명은 사진 찍어두지 않은 게 아쉬울 정도다. 조만간 시간 내서 미술관 홈페이지에 게시된 작품 설명을 읽어볼 생각이다. 적잖이 기대된다.
코톨드는 인상파 컬렉션이 매우 훌륭한 곳이다. 전시된 거의 모든 작품이 기억할만하다. 어떤 면에서는 적기 때문에 기억되기에 유리하다. 나는 2층 르네상스 전후 컬렉션도 즐겁게 관람했다. 특별히 더 귀중한 작품들이 아닐지 몰라도 미술관은 이들을 무엇보다 귀중하게 여기고 관리한다는 사실이 관람객에게 충분히 전달된다. 대접받는 소장품을 마주하는 기분이 무척 흐뭇했다. 무엇보다 큰 미술관에 없는 고요함과 평화, 여유를 여기서 충분히 즐겼다.
지하에는 비싸고 갖고 싶은 기념품이 잔뜩 있는 뮤지엄 숍이 있다. 그 길고 긴 유혹을 견뎌낸 내가 장할 따름이다. 여기서 산 명화 뱃지 4개는 집에 와서 봐도 흡족한 기념품이다.
미술관은 직사각형 회랑처럼 생긴 큰 건물의 일부다. 건물 안쪽 공간은 번잡한 런던 시내에서 오래 머물며 쉴 마음이 드는 몇 안 되는 장소였다. 예약시간 전에 도착해 해를 쬔 기억이 여행의 좋은 순간으로 오래 남을 것 같다. 미술관의 공간은 자주 소장품만큼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