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반 에이크, 롤랑의 성모 (루브르 박물관, 파리)
언젠가 시작될 여정이었다. 시작점은 놀라울 것도 없이 우피치에서 만들어졌다. 예수 경배 adoration였을 것이다. 그동안 시큰둥하게 지나쳤던 플랑드르 화가의 거대한 세 폭 제단화가 작년 여름에는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플랑드르 화가들. 마침내 그들이 내 관심 영역에 들어왔음을 감지했다. 내셔널 갤러리와 루브르는 당연히 플랑드르 화가들을 제법 많이 보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저 유명한 얀 반 에이크도. 나는 아직 한 번도 얀 반 에이크를 본 적이 없었다. 런던과 파리 여행에 대한 기대 중에는 얀 반 에이크 몫이 적지 않았다.
사실 얀 반 에이크에 대한 내 궁극의 로망이 널리 알려진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1434년 작, 내셔널 갤러리, 런던)'은 아니다.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가 갖고 있는 수태고지. 무릇 수태고지란 사랑스럽게 마련이다. 그러기로 되어 있는 주제이지 않은가. 한동안 내가 가장 사랑했던 수태고지는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에 있는 프라 안젤리코 작품(1443년 경)이었다. 두 번째 피렌체 방문은 이 작품을 보기 위해 이루어졌대도 과언이 아니다(이렇게 말하자마자 나의 최고 미남, 도나텔로의 성 게오르기우스가 나를 황당하게 바라보는 눈길이 느껴진다. 그렇게 내가 보고 싶다더니, 잊었니? 같은 뜻이다).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에서 그렇듯 천사 날개가 무지개 빛으로 묘사되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한 다큐멘터리에서 본 얀 반 에이크 수태고지의 천사 날개 색은 얼마나 선명하게 아름다운지! 느낌표를 빼고 그 느낌을 서술하면 틀린 문장이 되고 만다.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는 여전히 아름답지만 그것은 매우 템페라적인 아름다움이어서 부드럽고 온화한 파스텔 톤이다. 반면 유화로 작업했던 얀 반 에이크 그림 속의 선명함과 세밀함은 그만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꼭 한번 보고 싶은 그림이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은 과연 듣던 대로 대단했다. 누구나 칭찬하고 감탄하는 세밀한 묘사는 놀라울 정도의 완성도에 힘입어 끝없는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림 속 거울의 의미, 바닥에 놓인 신발의 의미, 개의 의미 등 그림 속 모든 것에는 그만의 의미, 비밀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그림의 정말이지 놀라운 점이다. 그림을 본 관람객이라면 무의미의 존재를 상정하기조차 힘들다. 모든 소품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 없는 문제다. 이 그림이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그들이 쉽게 그림 앞을 떠날 수 없게 만드는 현상은 그러므로 무척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림은 관람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질문은 간단해 보이지만 끝없이 계속된다. 또한 그 질문은 저항이나 거부를 불허한다. 관람객은 질문에 답할 수 있든 없든 하염없이 다음 질문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질문은 주문처럼 관람객을 홀린다. 관람객은 얼마든지 마법에 걸린다. 이 그림은 그렇게 마성의 그림이 된다.
그러나 나를 진정으로 매료시킨 그림은 '롤랑의 성모(위 그림, 1435년 작, 루브르, 파리)'였다. 이 그림에서는 디테일의 끝을 보여주지, 라고 말하는 화가의 말이 들리는 것 같다.
성모 뒤로 펼쳐진 도시 모습이 가장 놀라웠다. 성모 정수리 위에 천사가 든 왕관과 성모가 걸친 로브, 아기 예수가 손에 든 십자가의 화려한 보석이 얼마나 사실적으로 영롱하게 빛나는지, 건물 대리석 기둥머리 조각이 얼마나 정교한지, 그 뒤로 보이는 유리창은 얼마나 우피치의 유리창과 꼭 같이 생겼는지와 같은 감탄은 오히려 뒷전일 정도다. 성 모자와 롤랑이 있는 건물에서 조금 낮은 곳에 있는 것 같은 도시, 뾰족한 첨탑들과 건물 윗부분은 가본 적도 없는 벨기에 어느 광장의 건물들을 떠오르게 한다. 나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건물 하나하나를 헤아렸다. 이국적인 시공간의 이미지를. 그 뒤로 펼쳐진 구릉과 언덕, 더 원경에 흐릿한 산이 표제의 인물들보다 눈길을 끈다. 저렇게 멀리 있는데도 모든 게 선명하다. 오래 보고 몇 번을 돌아와 다시 봐도 더 들여다보고 싶었다. 결코 질리는 법이 없을 것 같은 복잡하고 수많은 디테일들이었다.
그다음으로는 실내에 이어진 바깥 공간의 식물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백합과 이름을 알 수 없는 꽃과 풀이 아름답다. 그 곁의 까치는 또 얼마나 반가운지. 어쩌면 이 까치들에 대한 의미 분석이 이미 어딘가에서 정설로 공유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편 이 세밀하고 정교한 묘사 속에서 건물 바깥쪽을 바라보는 두 사람은 내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저들은 누굴까? 왜 여기 있지? 왜 저렇게 난쟁이처럼 작게 그려졌지? 와 같은 물음들이다. 미술관 밖에서는 잠시 생각하다 일상에 떠밀려 사라지는 포말 같은 질문들이다. 그러나 그림 사진을 보면 곧 또다시 밀려온다.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에 있는 수태고지를 다룬 다큐멘터리에서는 이다지도 정교한 그림을 그렇게 많이 그려낸 얀 반 에이크라는 인물 자체에 대한 약간의 미스터리를 곁들인다. 이 모든 걸 한 시간쯤 들여다보면 그 미스터리에 물들게 된다. 그가 과연 인간이기는 했을까? 여기에 대한 답보다 중요하고 확실한 건 예술작품에 눈을 뗄 수 없는 매혹만 한 미덕이 없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