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날레토, 기념품을 넘어서

카날레토, 석공의 뜰(내셔널 갤러리, 런던)

by 만정

나는 베네치아에 네 번 방문했고 그중 세 번 아카데미아 미술관과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에 갔다(한 번은 라벤나 가는 길에 티치아노 성모승천을 보려고 세 시간 일정으로 굳이 본섬에 들렀던 때다). 다시 그중 한 번은 베네치아 비엔날레 기간이었다. 여행 메이트였던 엄마와 나, 우리는 가끔 그날을 즐거운 추억으로 떠올린다. 수많은 현대미술 작품과 인상적인 전시장소였던 아스날을.

돌아보면 내 서양 미술 감상 경험은 우피치 미술관이 열어준 것 같다. 시대적으로는 르네상스부터 전후로, 공간적으로는 피렌체 밖으로 넓어지는 여정에 가깝다. 그 이유에서인지 내게는 피렌체 르네상스가 하나의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미술, 일종의 미술 경전이나 원전처럼 작용하는 것을 때로 감지한다.

예를 들어 처음 베네치아 그림들에 별 감흥이 없었던 이유도 여기 있지 않나 싶다.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처음 방문한 것도 조르조네의 '폭풍우'를 보기 위해서였다(조르조네 역시 베네치아 화가지만 여기에는 조금 다른 사연이 있다). 저 유명한 티치아노, 베로네제, 벨리니 가족들을 발견하는 데에는 몇 번의 방문이 더 필요했다. 어떤 베네치아 화가들 그림 앞에서는 한 번도 시간을 보내지 않고 지나쳤는데 틴토레토나 카날레토가 그렇다. 베네치아에 이들 그림이 얼마나 많았는지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는 카날레토로 가득한 방이 있다. 카라바조에서 시작해 귀도 레니, 벨라스케스를 지나며 극적이고 종교적이고 큰 작품들이 넘쳐흐르는 거대한 바로크 방이 끝나고 좁은 문을 통과해 미술관 모서리 방에 들어서면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밝고 조용한 작은 방, 어둠과 피와 신이 없는 방이다.

이 방에서는 화려하게 빛나는 베네치아 운하와 산 마르코 광장이 눈을 사로잡는다. 맑은 날 대운하 풍경, 일상과 축제의 한때가 해상도 높은 사진보다 더 선명하다. 이 그림들은 기억과 회상을 위한 매개라는 것을 단숨에 알 수 있다. 관람객들이 방에 들어서며 경탄하는 이유가 그림 때문인지 그림이 환기하는 장소 또는 추억 때문인지 분별하는 것은 의미도 없지만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바로 이 기억과 회상의 매체가 필요한 관광지에서, 그 매체가 아직 사진일 수 없었던 시기, 카날레토의 풍경화는 동시대 다른 풍경화와 완전히 다른 의미와 가치를 지녔을 것이다. 살 수 있는 사람들은 그 그림을 사서 벽에 걸었을 것이다. 춥고 흐리기로 유명한 영국 가정집 실내 한 벽면에 화사하고 그 자체로 마법 같은 베네치아의 한때를 나라도 걸어두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이 방에 걸린 베네치아 풍경화들을 미술관이 소장하기까지 이력을 일일이 확인했는데 역시나 첫 구매자가 같은 그림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카날레토 그림은 기념품, 이라는 생각을 넘어서게 한 그림에는 그래서인지 운하나 산 마르코 광장이 등장하지 않는다. 석공의 뜰(1725년 작)은 관광지가 아닌 생활인들의 베네치아를 보여준다. 석공의 작업장과 주변 가정집들, 그 집에서 흘러나왔을 범부와 아이들, 닭 같은 것들로써. 그 뒤로 흐르는 운하에 떠있는 배들은 관광객을 위한 곤돌라가 아닌 트라게토일 것이다. 싼값에 운하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주는 그런 배.

특히 나를 취약하게 하는 부분은 다음 같은 것들이다. 돌먼지를 뒤집어썼을 것 같은 석공들. 동네 애들과 그 애들 어머니일 것 같은 여자. 18세기 초, 그러니까 200년 전에 이 지구에, 저 신비로운 석호의 땅에 노동자며 주부로 살다 죽어 이제는 흩어져버렸을 한때의 인간 존재들 말이다. 누구인지 알아낼 수 없을 필부필부들. 나같은 사람. 나 역시 그들처럼 사라질 것이다 언젠가는 아무도 나의 존재를 알 수 없게될 것이다. 이런 그림이나 박물관에 전시된 오래된 거울, 작은 사기 그릇 같은 걸 보면 때로 더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들이 생생하고 가깝게 느껴지는데 그럴 때 마음이 찌릿해지는 것이다. 특히 그림 오른쪽 가장자리를 이루는 집에는 지금 베네치아 어느 건물 유리창에 걸려있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 없는 커튼이 밖으로 걸려 해를 받는다. 오른쪽에 길게 매달린 커튼 한쪽 끝은 작은 바람에 살짝 나부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순간 그림은 나와 같은 시간을 산다. 건물 제일 위층 모서리에 걸어둔 화분들은 탄탄한 육지도 아닌 땅에 틈만 나면 심어둔 나무들이 아직도 무성하게 늙어가고 꽃 피우는 내 기억 속의 베네치아을 떠오르게 한다. 나는 이 척박한 섬 사람들이 틈틈이 창가에 걸어두는 화분을 사랑한다. 카날레토도 그랬을지 모르겠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 모서리 방에는 카날레토가 방 한가득 걸려있다. 이곳에서만큼은 나도 카날레토를 가까이에서 자세히 오래 보게 된다. 카날레토를 감상하기에 이보다 완벽한 곳은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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